극세필·진채의 우아한 고풍 고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이당 김은호화백은 동양화단의 첫손꼽는 원로요 거봉. 그럼에도 환갑에 이르도록 「이발장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그가 그림을 배우기 전인 17세에 가세가 몰락해 고향인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일거리를 찾아다니다가 이발소에서 잠시 잡역 노릇을 한 일이 있는 까닭에 동교화우한테 그런 농을 받았다.
뿐더러 이당엔 3년간 제화공· 측량기사의 조수, 도장포의 각자공·인쇄소 제판공 등으로 일자리를 찾아 전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일에 만족하지 않고 고생하면서도 시련을 극복해갔다.
□…이당은 그림을 배운지 1년만인 기세 (1914년) 에 어용화가로 발탁될 만큼 천부의 화재를 보였다. 그는 우연하게 서화미술회에서 수업료없이 배우는 특전을 얻었는데 여러 화학도 중에서 출중하게 뽑혀 조선왕조의 마지막 두 임금 즉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맡게 된 것이다.
초라한 시골뜨기 청년으로는 감히 생각할 수 조차 없었던 소례복에 사모를 처음 갖추고 궁궐 (덕수궁)을 출입했다. 임금님을 뵙고 사진을 참고해 어진을 그렸는데 왕은 매일 잠깐씩 제작하는 방에 나와 보고는 하도 기특하였던지 『얼굴 좀 보자』며 청년 이당을 칭찬했다.
어용학사로 이름을 떨치자 화려한 입신이 약속된 듯 싶었다. 그는 이제 다른 생각 할 틈이 없도록 화가로서의 수업에 골몰하게 됐다.
곧 천도교의 수운 해월 구암 초상화를 비롯해 민병석 윤덕영 윤택영씨 등 당시 권문대가들의 초상화 의뢰가 줄이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는 이당이 초상화가로서가 아니라 현대적 작가로서「데뷔」하는 시기다. 그에게는 자연 지원해 주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소정 변관식과 함께 도일해 3년간 동경미술학교의 청강생 (25∼28년) 이 됐으며 또 의재 허백련씨와 함께 배경을 여행했다.
이당이 잘 그리는 금강산 도는 이때 얻은 「스케치」에서 비롯된 것. 또 미남배우 매난방 미인도는 북경행에서 얻은 소득이다.
이 시기에 그는 유화를 그려 일본의 제전에 입선하기도 했고 특 극채세필의 미인도는 여러 전람회에서 상을 안겨 주었다. 그래서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명사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런 여세를 몰아 1937년에는 일제하의 선전에서 한국인 최초로 심사위원의 자격을 얻고 추천작가가 됐다
□…이당은 북종화의 전통을 잇는 한국현대화단의 유일한 채색화가이다. 극세필 묘사에다 진채를 사용하고 있는 점은 아무도 추종을 불허한다.
인물이 지닌 표정뿐만 아니라 전신의 동작에서 우러나는 우아한 선감을 유감없이 발휘하였고 색채가 지닌 그 고유한 성격을 대담하게 펼쳐서 그의 강렬한 특성을 보여왔다.
그것은 그의 깔끔하고 따스하며 강직한 성격에 연유한 것이다. 동양화단을 온통 휩쓸다시피하는 시상위주의 남화를 거부하고, 전래의 고법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법에 사로잡히지 않고 근대적 감성으로 확대했고, 그의 문하에서 뛰어난 후진들을 많이 배출했음에도 각기 개성적인 작업을 하도록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 점은 그가 동양화단에 남긴 커다란 공적이다.
□…후소회는 1936년에 발족된 이당문하생의 모임이다. 그가 그림공부를 시작할 때 그랬던 것처럼 그의 문하생을 보살핌에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벙어리 청년을 맡아 대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골목길의 사과장수 소녀도 데려다가 쟁쟁한 작가로 키워놓았다. 곧 그림을 가르치는데 그치지 않고 때로는 먹여주고 재워주는 처지였다.
그는 다른 화가들처럼 미술대학교수로서 제자를 가진 것이 아니라 사숙에서 한 사람 한 사람 가꿔낸 제자들이다.
그의 화실에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모여든 사람들로는 김기창 이유태 조중현 정홍거 이용승 백윤문 이석호 장우성 한화동 김한영 정완섭 김화경 배숙당 장운봉 허민 윤수용 이규옥 오주환 이계만 박창선 이종구 안동숙 정도화 장용준 강희원 이창호 금재배 이경길 이남호 김학수 이헌중 안종원씨 등 1백여명을 헤아린다.
○…그는 일제 때 명성을 드날린 관계로 해방 후에는 한때 화단에서 따돌림을 받았다. 국전에는 물론 대한미협에서도 그의 이름은 찾아볼수 없다. 그 기간에는 초상화를 제작하는 일과 제자를 기르는 일로써 화실에 거의 묻혀있었다. 그가 화단에 복귀한 것은 56년 이후다.
한편 그는 1940년께부터 10여년간 위병에 시달려 거의 제작생활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즉 4O대의 가장 중요하고 왕성해야 할 시기를 허송한 것은 그의 평생에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온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