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 장애인 교류 이제 시작일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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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장애인의 존재를 밝히기 꺼려했던 북한이 공식적으로 이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북한 장애인들의 삶에 따뜻한 봄 햇살이 비춰지기를 기대합니다."

지난달 22~26일 북한을 방문해 휠체어 1백대를 기증하고 돌아온 세계밀알연합회 이재서(52.총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회장. 앞을 못 보는 그는 남북한 장애인 교류사업의 첫 물꼬를 튼 것에 대한 감회를 이같이 밝혔다.

"1990년대 미국 유학 당시 유엔 북한대표부에 북한 장애인의 실태 자료를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북한에는 의술이 발달돼 장애인이 없다'는 다소 의외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비록 북한 장애인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시작이 반이겠지요."

李회장의 이번 방북은 지난해 12월 북한을 방문했던 기독교계 인사를 통해 장애인 교류사업에 대한 협력을 요청한 끝에 이뤄졌다.

연합회는 이번 방북길에서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 장애인 교류사업을 위한 의향서에도 합의했다. 이에 따라 연합회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통해 휠체어 등 보장구와 의약품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李교수가 79년 설립한 세계밀알연합회는 한국을 포함, 6억명에 달하는 전세계의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세계선교기구다.

현재 국내에 28개, 미국.유럽 등지에 32개 등 총 60개의 지부를 두고 있으며, 회원은 4만여명에 달한다.

李교수가 선교단체를 이끌면서 교단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집념과 열정 덕분이었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그에게 불행이 찾아온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76년 15세 때. 갑자기 열병을 앓은 뒤 눈이 침침해지면서 시력이 나빠졌다.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할 여유조차 없이 순천.광주.서울 등지의 병원을 전전했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된 그는 실명에 따른 원망과 좌절감으로 인해 자살을 결심하는 등 한동안 자포자기했다.

"한 폭의 파스텔화처럼 아름답던 고향 풍경을 다시 볼 수 없게 된 것이 큰 충격이었죠. 어린 시절 뛰놀던 들녘, 지게를 지고 다녔던 골목길, 동네의 감나무, 늘 찾던 학교 도서관 등이 암흑 속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죠. 집에서 경작하던 논 일곱마지기가 제 눈을 치료하느라고 절반으로 줄어 살림이 어려워졌습니다."

이후 그는 서울맹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73년 5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를 들은 것을 계기로 해 신앙을 갖게 됐다.

종교인이 된 그는 뜻을 펼치기 위해 75년 순천고등성경학교를 찾았다. 그러나 입학 담당자는 "앞 못보는 사람이 안마나 배워 살면 되지, 성경은 알아 뭐해"라며 그를 냉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학교에 들어가 졸업까지 했지만 그의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77년 총신대에 입학원서를 냈을 때 학교 측은 '장애인이 공부할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했다. 눈물을 흘리며 사정한 덕분에 '공부를 못 따라갈 경우 학교에서 퇴학을 시켜도 두말 없이 따라야 한다'는 조건으로 입학이 허용됐다.

졸업 후 84년에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선교활동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사회복지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10년간 점자.녹음 도서 등을 이용해 피말리는 공부를 한 끝에 템플대학에서 사회복지행정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94년 '한국 기업주들의 고용 경향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로 럿거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그는 총신대 교수로 임용됐다.

그의 꿈은 연합회 지부를 1천개로 늘리고, 미 뉴저지주에 매입한 7만평의 땅에 장애인선교훈련원을 건립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은 76세지만 이 가운데 10년은 병들어 장애 속에 삽니다. 그 만큼 장애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장애인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세요."
하재식 기자angelh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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