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의 먼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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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당대의 명승 홍인이 자기 비법을 이을만한 후계자를 뽑으려고 7백명의 제자들에게 게를 내놓으라고 일렀다.
신수라는 고제는 써내기를
신시보제수
심여명경대
시시근불식
막사간진애
몸은 보제수와 같고, 마음은 맑고 고운 거울과 같은 것. 따라서 항상 더러워지지 않도록 닦아내서, 번뇌의 먼지를 털어 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자 또 다른 제자인 혜능은 그것 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면서 다음과 같은 게를 써냈다.
보제본무수
명경역비대
본내무일물
하처간진애
보제라는 나무도 명경이라는 마음도 없다. 번뇌도 있을 수 없다. 본래 무일물이다. 먼지가 묻을 것도 없으니까 닦아낼 필요도 없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결국 홍인의 선법은 혜능이 이어받게 되었다.
아무리 마음을 매일같이 닦아낸다고 누구나 부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또 아무나 본래무일물이라면서 그날 그날의 수행을 게을리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본래무일물이라는 인식에 이르는 것부터가 범속의 무리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해가 또 저물어간다.
갖가지 번뇌가 그대로 쌓인 채 l978년이 지나고 또 다른 한해를 맞게 된다.
씻기가 바쁘게 쌓이기 만한 번뇌들이었다. 아무리 닦아내도 맑아질 수 있는 마음도 아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먼지가 쌓일 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마음이라도 편하지 않겠는가.
범속의 무리는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그리하여 더욱 쌓인 번뇌를 안고 또 한해가 저물어간다. 워낙이 번뇌는 많다. 1백8개나 된다. 한해 동안 애써 다 씻어 낸다 해도 새해가 되면 또 새로운 1백8개의 번뇌가 쌓이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새해라고 반가울 것도 없다. 묵은해라고 새삼 아쉬워할 것도 없으리라.
그러면서도 세모에는 누구나가 뭔가 아쉬운 정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본래가 무일물이라는 깊은 선심을 우리가 헤아릴 길은 없는 것이다.
지난 한해동안 수많은 실망과 좌절을 맛보았을 것이다. 새해라고 달라지기를 기대할만한 것도 별로 없다.
그러면서도 새해를 은근히 기다리게 된다. 역시 인간은 어리석은가 보다. 그래도 좋다. 결국 우리에게는 신수의 가르침을 따르기가 더 쉬운가 보다.
한해가 또 저물어간다. 또 한겹, 마음에 잔뜩 손때를 묻혀놓은 채 한해가 저물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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