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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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통금위반에 대한 규제는 엄해야 되겠지만, 잠깐 실수한 사람들에게 대한 변은 지나치다 싶게 가혹했다.
바람을 쐬러 동네에 나왔던 사람들도 자기 집을 눈앞에 바라보고도 함께 벌을 서야만 했다.
길바닥에 무릎을 꿇고 깍지낀 두 손을 머리 뒤로해서 앉아있기란 참으로 고역이었다.
한여름밤 이긴 했지만, 그런 자세로 새벽 통금해제 시간까지는 참으로 길고 지루한 밤이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권총을 휘두르던 사복경관은 위반자들을 풀어주었다.
우리 일행은 초량동에서 광복동까지 줄곧 걸어서 단원들이 묵고 있는 여관엘 닿았다.
모두들 씁쓸한 기분이었으나 여관엘 들어서니 한결 감정이 가라앉았다. 단원들도 일찍 일어나 있었다. 하긴 첫 회 공연을 하려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다. 그러나 단원들의 분위기가 여느 날 같질 않았다. 보통 때 같으면 세수를 하거나 소도구를 챙기거나 하며 부산을 떨 터인데 한결같이 어정쩡한 태도로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알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뭣들 하고 있어, 공연시간 늦겠다.』 그러나 이 독촉에도 슬금슬금 피하기만 할 뿐, 불만 투성이의 표정은 바꾸질 않았다. 사태는 꽤 심각한 편이었다. 그래서 한 친구를 불러 무슨 영문이냐고 물으니 그 친구의 대답은 단호했다. 『연극을 못하겠어요. 우리는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어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무슨 소리냐. 극단의 「스트라이크」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동인제가 아닌가. 누가 자본가이기에 누가 누굴 상대로 동맹파업을 한다는 거냐-』고 따져 물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들의 불만원인을 알게됐다.
이유인즉 『소위 극단의 간부들이란 인물들이 여배우를 데리고 나가 밤을 세우고 들어왔으니 이게 될 일이냐. 그런 지도자 아래서는 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불만이 너무나 철없고 단순해 밤을 새웠던 우리들은 껄껄 웃었다. 밤새 참기 어려운 곤욕을 치르고 들어온 사정도 모르는 그들이 원망스럽기조차 했다.
결국 오해가 풀려 공연연습을 서둘렀지만 젊은 단원들의 반발 뒤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조미령 때문이었다. 그들이 아끼는 조미령을 데리고 나가 밤을 새우고 왔으니 오해를 살만도 했다. 나중에 주모자가 누구인가 알아보니 조백령이란 친구였다.
여러 젊은 단원 가운데서도 유독 조미령에게 빠져있던 연기자였다. 조백령은 애정문제에서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극단운영에 불만투성이었다. 사사건건 트집만 잡고 불평만을 늘어놓아 단원들도 좋아하는 이가 없었다. 결국 「스트라이크」사건을 계기로 극단은 그를 제명시켰고 이 일 때문에 나는 그에게 호된 보복을 받았다.
조백령은 좌경사상으로 그 뒤 투옥됐었고 6·25가 터지면서 풀려났다.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 뒤 그는 나의 집을 찾아와 나를 내놓으라고 가족을 못살게 굴면서 공포 속에 몰아 넣었다.
내가 자랑하던 장서를 모두 빼앗긴 것도 6·25중 그의 손에 의해서였다.
지방공연의 「에피소드」는 이것뿐만 아니다. 특히 『목격자』『대춘향전』의 경우는 남자 역 치고 내가 안 해본 역은 없다.
누가 이상이 생기면 대역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역 저 역 대역을 하다보니 극중에 등장하는 남자 역을 모두 한번씩 다 해본 것이다.
특히 『대춘향전』에선 한꺼번에 방자와 변학도 역을 번갈아 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도 유치진 선생의 『춘향전』엔 변학도와 방자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없어서 이런 모험이 가능했는데, 관객들은 전혀 눈치 채질 못했다.
지방 공연을 떠나면 보통 40여일이 걸린다. 요즘과는 달리 교통사정이 좋지 않던 시절이라 이 곳 저 곳을 옮겨 다녀야하는 단원들의 고생은 말이 아니다. 그러나 더욱 딱한 것은 서울에 남겨진 가족들이다. 40여일 동안 서울을 떠난 단원들은 집안살림이 밥이 되는지 죽이 되는지 전혀 돌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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