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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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춘향전』공연을 앞두고 단원들의 각오는 대단했다.
유치진 선생의 좋은 작품에다가 유 선생의 연출, 제법 여유 있게 뒷받침이 된 공연비, 그리고 한국을 찾는 「유엔」감시단의 귀한 손님을 위한 공연이었기 때문에 단원들은 한결같이 한판 멋들어진 연극을 해보자고 단단히들 마음을 먹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배역은 정석대로 김동원이 이도령, 김선영이 춘향, 변학도에 이화삼 등으로 안배가 되었는데 방자역을 맡은 내가 문제였다.
김동원은 동경「학생예술좌」시대부터 이도령역이 단골이었고 김선영이나 이화삼도 신파극에서나 그 뒤의 「악낭극회」「현대극장」등에서 『춘향전』이 공연될 때마다 춘향이나 변학도역을 줄곧 맡아왔기 때문에 그 역에 대해선 모두 도사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나만 방자역이 처음이었다.
『춘향전』에서의 방자역이란 1막에서 이도령과 춘향의 인연을 맺어주는 대목만 중요하고 2막부터는 별 볼일이 없는 역으로 극 전체를 볼 때는 별로 비중이 큰 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익살·기지·아첨·하급관리의 허세 등을 모조리 다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연기로서는 그리 만만한 편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유 선생의 『대춘향전』엔 방자가 춤도 추고 창도하는 대목이 있어 더욱 연기가 까다로왔다. 내가 우리 고유의 창이나 춤을 잘할 리가 만무했다.
연습때 기를 쓰고 애를 썼지만 무대에서 과연 잘 될지 걱정이 태산같았다.
그러나 이미 배역은 정해졌으니 방자역을 안 할 도리가 없었다.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찬 관객 앞에서 첫날의 공연을 자성공으로 막을 내렸다.
방자역을 하느라 큰 고역을 치렀는데도 동료들이나 관객들은 연기가 훌륭했다고 격려하면서 추켜주었다. 그때서야 『이제 됐구나』하고 안심을 했다.
긴장된 공연이 끝나고 하루의 막이 내리면 으레 한잔 술을 하기 마련이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화삼·오사랑 등 몇몇 친구와 극장안 분장실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2월, 살을 에는 혹한은 지나갔지만 폭설 뒤의 늦겨울은 그래도 추위가 대단했다. 분장실 안에 훈훈히 숯불을 피워놓고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며 마시는 술은 여간 즐겁지 않았다.
주거니 받거니, 또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다 보니 아차, 그만 통금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자리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했다. 즐겁고 유쾌한 기분으로 숯불 곁에서의 하룻밤 낭만은 좋았으나 이튿날 깨어보니 이게 어찌된 일인가. 내가 그만 목이 꽉 쉬어버렸다. 첫날 나도 모르게 열연을 했는 데다 밤새 숯불연기를 마신 것이 그만 탈이 된 모양이다.
대사는 고사하고 말소리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방자역을 바꿀 도리밖에 없었는데 그때 나를 도와 대역을 해준 이가 또 오사랑이었다. 좌익 연극인의 「테러위협」때도 나를 도와주었던 오사랑이가 또 한차례 나의 곤경을 구해줬던 것이다.
하루를 쉬고 나니 목은 말끔히 가라앉아 그 다음날부터는 다시 무대에 서 1주일 동안의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대춘향전』의 대성공과는 대조적으로 흥행의 참패를 본 연극이 1948년 6월에 공연됐던 『포기와 베스』였다.
2월의 『대춘향전』 뒤, 3월의 『춘향』(정비석 원작)을 끝내고 공연된 연극이었다.
「포기와 베스』는 흑인의 애수를 그린 작품으로 재미도 있고 짜임새도 있는 연극이었는데 관객만은 비로 쓸어내듯 없었다.
『포기와 베스』는 연극제의 출품작이었으며 내가 처음으로 연기상을 수상한 연극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작품에서 앉은뱅이 주인공인 「포기」역을 했는데 앉은뱅이니까 움직이는 것도 별로 없는 역이었는데 어떻게 연기상이 내게로 돌아왔는지 몰랐다.
지금까지의 연극에선 젊고 미남 주연엔 으레 김동원이가 단골이었고 나는 반대로 악역으로만 출연해온 것이 틀에 박혀 있었다.
그런데 『포기와 베스』에서만 그 역이 바뀌었다. 나는 착한 주인공이 됐고 김동원은 나의 아내 「베스」를 유혹하는 음흉하고 악한 「크라운」역을 맡았던 것이다. 나는 앉은뱅이였기 때문에 움직이는 게 없었지만 대신 김동원의 「크라운」역은 「다이내믹」한 동작으로 관객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이 연극 공연중에도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계속><제자 이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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