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의 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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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조의 석학 다산은 이런 한탄을 한일이 있었다.
『4백여년간 예복을 갖추고 조정에 나선 자만도 몇천 몇만이 되련만 청백리로 뽑힌 자는 이것밖에 안되니 어찌 사대부의 수치가 아닌가.』
태조조에서 순조조에 이르기까지 『청백리록』에 오른 인물은 2백도 못된 겨우 1백90여명이었다. 그것을 개탄하는 말이다.
청백리는 원래 사자에게 붙여 주는 영예로운 명칭이었다. 생존해 있는 양리는 염근리라고 했다.
고려 때의 양리는 지방관 역임자로서 청신 인후하며 백성을 무육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목민관(일선 공무원)의 수령 임무도 바로 그런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전야나 농지를 넓히고 호구를 늘리며 부역을 고르게 하고 사송을 간결하게 처리하며 도둑을 막는 일.
다산은 그의 『목민심서』에서 『청렴은 수령의 본무요, 모든 선의 근원이요, 덕의 바탕이니 청렴하지 않고는 수령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조선 왕조 때 분경죄 라는 것이 있었다. 벼슬을 따려고 숨이 차게 뛰어다니는 사람. 이들에겐 곤장 1백번과 유배 3천리의 형벌이 내려졌다. 뇌물을 받은 「원악 향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탐관오리로 낙인이 찍히면 손자의 3대와 사위까지도 중요 공직에 오르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도 청백리가 귀했던 것은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신라 때 검군이란 화랑이 있었다. 동료들이 곡간을 열고 곡식들을 나누어 가질 때 그는 감연히 눈을 감고 이를 거절했다.
『나는 의가 아니면 비록 천금의 이가 있어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그는 끝내 죽음까지 당했지만 청백리란 그만한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
오늘 우리의 주변을 보면 그래도 청백의 봉사자들은 적지 않다. 행려병자의 불행을 돌보는 중년의 여류 지방 관리로부터 면사무소의 서기에 이르기까지 「사명」과 「헌신」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양리들이다.
본사의 보람스러운 연례 행사 가운데 하나인 청백봉사상은 올해도 30여명의 수상자를 찾아냈다. 30대 혹은 40대가 그 주류인 것을 보면 더 한층 기대가 새롭다. 이런 말없는 민주 공복들의 고되고 힘겨운 「수절」은 곧 소금과 빛이 되어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지켜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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