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에도 책임있는 "문학의 상업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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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근자에 이르러 우리문학이 다소 활발해 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것은 과거에 비춰볼때 매우 다행한 일이지만 그 활발한 상황의 배후에는 몇가지 마지고 넘어가야 할 문제도 있어 반드시,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 문제를 독자층의 구조와 문학비평의 두가지 측면에선 검토해 보고자 한다.
우선 요즘 우리나라의 문학독자층을 분석해 보자, 일부 인기작가들이 자기작품이 많이 읽힌다고 자랑하고 있다는 말을 곧잘 듣게 되는데 그들 인기작가를 흥분하게 하는 독자층이 대체로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는가를 따져보면 그게 별로 자랑스러운 것이 못된다는 것을 곧 알수 있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작품들을 즐겨 읽는 독자층은 20세 안팎의 여성이 대부분이라는 것이 여러 문인들의 공공연한 견해다.
물론 20세 안팎의 여성들이 즐겨 읽는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가 훌륭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 볼때 주로 이런 층의 독자들에게 이해가 되고 주로 이런 층의 독자들에게 인기있는 작품들 가운데 과연 높이 평가될 만한 것들이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도 그들 『대중작가』들이 오늘날 가장 훌륭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훌륭한 것처럼 선전되는 것이 오늘날 우리문단의 풍토다.
우리문학이 올바른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두가지길이 있다. 하나는 독자층의 구조를 연령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이상적으로 바꾸어 가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대중적인 상업주의 문학과 그렇지 않은 문학의 이중적 문단구조를 인정하는 일이다. 대중에게 인기가 없는 작가는 실력없는 작가로 치부되는 문단풍토는 불식돼야 한다.
그것이 곧 문학비평의 기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인기작가들만이 비평가와 구급문학 저널리즘에 의해서 항상 옹호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문단에서의 비평행위가 절제 있게 잘 행해지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인기작가=훌륭한 작가』라는 공식에 비평가나 저널리즘이 조금도 의심을 가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비평가나 문학 저널리즘의 습관화된 친점에서 기인하는 것일 터이다.
우리나라의 비평가들은 거의 모두가 대학과 언론(신문이나 주간지 등의 문학잡지), 그리고 출판업에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마땅히 객관적이어야 할 비평이 본의든 아니든 간에 상업화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자기가 관계하는 잡지에 실었던 작품을 자기가 관계하는 출판사에서 출간하고, 또 자기네가 관계하는 신문·잡지에 서평까지 쓰며, 자기네가 관계하는 문학상심사나 명가에 무조건 끌어넣는 일도 있다.
이런 경우 비평가 개개인이 아무런 사심 없이 객관적인 안목을 가지고 작품평가에 임할 수 있겠는가. 그네들이 과연 작가들에 대합 대승적인 인기를 감안한 상업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작품평가에 임할 수 있겠는가.
평론가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업화에 가담하다보면 언젠가는 대중적인 작품이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진해를 갖게 되는 문학적인 모순에 빠져버리게 될 것이다.
유능한 비평가들이 수준낮은 독자층도 능히 즐기는 그런 쉬운 작품을 뒤따라가면서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문학적인 이론으로 설명을 하고 있으니 이는 비평이라기보다 출판 선전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그들이 행하고 있는 각 신문·잡지의 월평이나 연평, 또는 문학사적인 작업에도 이런 속단과 편견이 작용하여 빈축을 사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는데 우리문학을 위하여, 그들 자신을 위하여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름지기 비평은 독자와 작가, 그리고 언론과 출판의 이런 속된 역학관계에서 완전히 초월하여 아침이슬과 같이 때묻지 않은 눈으로 이뤄져야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을병<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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