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갈수 없는 나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튿날 아침 9시경, 경식이 간밤에 부산으로부터 받은 연락 내용을 계장에게 마악 보고하고 난 다음이었다.
비상전화의 벨이 울리고, 박형사가 전화를 받아 메모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네? S동 박충현씨의 자택 풀장에서? 네, 네. 박충현씨의 장남 박용기씨가 시체로 발견….』 계장의 눈썹이 번쩍 치켜 올라갔다.
『뭐야?』
그러나 박형사는 전화를 받는 일에 열중하여 계장의 묻는 소리를 듣지 못한 듯했다.
『네? 네, 네, 칼에 찔린 시체로…수영복 차림으로요. 네, 알겠습니다.』 계장이 다시 다그쳐 물었다.
『뭐야? 박형사. 누가 어떻게 됐어?』
박형사는 그제야 계장 쪽을 돌아본 뒤 급히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메모한 것을 손에 쥔채 계장의 책상으로 뛰어오다시피 했다.
『사건입니다. D증권 사장 박충현씨의 장남 박용기씨가 자기 집 풀장에서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됐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박용기?』
하고 계장이 부르짖었고 경식은 순간 무엇으로 뒤통수를 한 대 호되게 얻어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박용기라면 그도 두어 번 만나본 적이 있는, 저 <오인방> 멤보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이상철이 피살되던 날 밤, 플로어에 나갔던 22명중의 한 사람이자 죽은 이상철과 신우영일 그리고 지금 채나영과 함께 부산에 가 있는 김광배들의 친구인, D증권 사장의 맏아들…. 그가 자기 집 풀장에서? 수영복 바람인 채 칼에 찔린 시체로? 이것은 무엇인가?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아닌가. 채나영은 지금 김광배와 함께 부산에 가있다. 그런데 김광배 아닌 박용기가? 그것도 자지 집 풀장에서? 수영을 할 계절도 아닌데.
사건을 채나영과 결부시켜서만 생각해 온 것이 실책 아닌가. 안이하고 얼빠진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때 계장의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뭣들 하고 있어? 어서 현장에 나가볼 생각은 않구.』 그렇다. 무엇보다 현장엘 가보는 일이 급하다.
경식은 곧 서둘러 감식반에 연락을 취하고 차량을 수배했다. 그리고 그들이 S동에 있는 박충현씨의 대저택에 도착한 것은 20분쯤 후였다.
그것은 실로 대저택이라 할만한 것이었다. 좋이 수천 평은 됨직한 대지와 정원, 정원에 들어찬 이름 모를 각종의 수목, 마치 숲 속에 우뚝 선 듯한 2층 양관(양관)의 규모가 그랬다.
풀장은 그 양관으로부터 얼마쯤 떨어진, 정원의 한 복판에 있었다. 정원의 수목들에 가려 양관 쪽으로부터의 시야는 상당부분 차단되어 있었으나 풀장 전체에서는 햇빛이 잘 닿게끔 되어 있었다.
풀에는 맑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시체는 건져 올려져서 풀 가에 반듯이 뉘어져 있었다. 심장 부근에, 손잡이가 나무로 된 칼이 꽂혀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과도인 것 같았다.
칼이 꽂힌 부위에서 흘러나온 피가 물에 씻긴 탓인 듯 조금 엷은 느낌의 붉은 빛으로 가슴 주의를 물들이고 있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