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2014년인 듯 2014년 아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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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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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도 그의 정신이 속해 있는 시대는 각각 다를 수 있다. 이를테면 생각의 성장이 30년 전에 멈췄다면 그는 2014년이 아니라 1984년을 살고 있는 것이다. 머리에 착용하면 그 사람의 정신적 연식(年式)이 나타나는 헬멧형 기계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필시 사용자들 사이엔 이런 대화가 오갈 것이다. “당신은 몇 년이죠?” “저요? 2002년인데요.” “그해 한·일 월드컵이 있었죠?” 이런 대화도 가능하다. “난 1972년이더군.” “그해는 유신헌법이 선포….” 정신적 연식은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다. 70대 어르신이 2014년을, 30대 젊은이가 1980년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세상만사를 정치에 활용하고 싶어 하는 정치인들이 그냥 놔둘 리 없다. 당장 인사청문회에 헬멧 검증을 도입할 것이다. “후보자는 선서하고 헬멧을 머리에 쓰세요. 푹 눌러 쓰세요. 뭐가 두렵습니까.” 헬멧은 선거 이슈로 등장할 수도 있다. “국민이 원한다면 기꺼이 쓰겠다.” “헬멧을 강요하는 건 포퓰리즘이다.” 후보자들 사이에 공방이 오갈 것이다. 몇몇 정치인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라”며 러다이트(기계파괴) 운동을 벌이지 않을까.

 하지만 세상 흐름을 거스르는 건 바보짓이다. 차라리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상책이다. 정부 예산을 투입해 주민센터와 지하철역에 헬멧 부스를 설치하는 것이다. 그러면 유권자 자신들도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테니. “여보, 난 1977년이더군. 70년대를 대변할 정치인을 지지해야겠어.” “당신 좋을 대로 해요. 하지만 입 다물고 조용히 투표해요.” “그래. 그러는 게 낫겠지?”

 정치인들이 저마다의 시대로 ‘커밍아웃’을 할 수도 있겠다. 70년대 당(黨)과 80년대 당, 90년대 당, 2000년대 당, 2010년대 당으로 헤쳐모여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상은 여기까지다. 6·4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민심이 여권과 야권을 동시에 경고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나는 시대 역주행의 물줄기가 선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눈물이 진심이었다고 해도 그 눈물을 선거 마케팅에 이용한 여당의 모습은 그야말로 50, 60년대식 적폐였다. 야당 역시 오늘을 변화시킬 정책 대안을 내놓지 못한 채 자유당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정권심판론을 꺼내들었다. 정부·여당의 ‘자살골’ 나오기만 기다리는 건 거의 조건반사가 돼 버렸다.

  박 대통령이 다짐하고 있는 공직사회 개혁도 다르지 않다. 관료들은 “법피아(법조 마피아)가 관피아(관료 마피아)를 척결할 자격이 있느냐”고 수군거린다. NLL 대화록 수사는 검찰이 일사불란한 구체제로 복귀하고 있다는 신호탄 아닐까. 이 와중에도 언론은 ‘보수냐, 진보냐’의 흘러간 진영논리만 틀어댄다. 이런 퇴행적 행태들은 ‘원론만 있고 각론은 없는’ 비전문성과 실력 부족에서 비롯되고 있다. 지금의 전선(戰線)은 좌우가 아니라 시대와 시대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2014년 세월호는 한국 현대사를 가르는 이정표다. 많은 것이 변할 것이다. 아니, 변해야 한다. 정치와 관료, 법조, 언론의 민낯을 가리고 있던 가면은 반쯤 벗겨진 상태다. 그러나 외국어도 필요 없고, 세계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이들 분야는 대표적으로 바뀌지 않는 영역들이다. 그 결과가 멋지게 이기지도, 멋지게 지지도 못한 이번 선거의 결과인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과제는 이 시대착오들을 어떻게 헤쳐나가느냐다.

 “연인인 듯 연인 아닌 연인 같은 너….” 사귀면서도 공식 커플이 되길 꺼려하는 요즘 세태를 노래한 ‘썸’의 가사가 왠지 가슴에 와 닿는다. 6·4 지방선거는 2014년인 듯 2014년 아닌 2014년 같은 선거였다. 이제 한국 사회가 세월호 이전의 시대로 ‘썸’을 타고 있다는 사실만 자각해도 아직 많은 것이 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