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후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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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9·28수복으로 함춘원에 되돌아온 내가 대학병원장으로서 얼마나 고충이 심했는지는 앞서 이야기한 바 있다.
1949년11월7일 나는 국립서울대학병원장이라는 보직을 받았다. 외과대학교수로서 총장의 발령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1956년10월4일 두번째 병원장의 발령을 받았던 것과는 그 성격과 내용이 다르다. 두번째는 서울대학교 외과대학부속병원장에 보한다는 문교부장관의 발령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최근에 기구개편과 병원 신축을 끝내고 10월15일 개원식을 하는 서울대학병원 원장에 김홍기박사가 부임하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김원장의 경우 교수겸직이 없는 점과 대통령 발령을 받는 점이 다르다. 아직도 함춘원은 8·15이후 겪어야했던 혼란과 무질서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여서 나의 책임은 실로 막중했다.
특히 당시 대학병원에는 제1병원과 제2병원이 있었는데 모두가 소격동소재 전경의전병원인 제2병원 근무를 꺼리고 기피하는 바람에 이를 설득하느라고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시설이나 위치, 그리고 여러가지 조건이 좋은 제1병원(연건동소재 전성대부속병원)에만 근무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때 제2병원장에는 1949년 봄 육군 군의감으로 전직한 윤치왕교수의 뒤를 이어 소앗과의 이선근교수가 취임했었다. 이 제2병원은 6·25때 36육군병원의 본원으로 사용되어 수많은 전상환자를 치료하다가 환도후 군에 이관되어 육군종합병원으로 되었다.
이야기가 앞으로 되돌아가 버렸는데 1·4후퇴때로 화제를 돌려야겠다.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국군과 연합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서울은 다시 혼란과 당혹에 빠졌다.
서울에 되돌아 왔던 정부기관도 서울철수작전에 따라 다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1950년12월초. 함춘원 (대학병원과 서울대의대) 의 총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몸으로서 침식이 편할리 없었다. 6·25때 인재와 기재를 많이 잃어버렸던 쓰라린 경험을 겪은 터여서 후송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트럭」 한대 구할 길이 없었다. 대학본부나 문교부조차도 물자수송에 필요한 차량 한대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수송기관은 군에서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적의 포성이 가까이 들려올 정도로 정세는 위급했다.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군과 접촉했다. 병원기재를 옮겨 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유엔」군측은 대학병원을 일시 육군병원으로 개편해서 전시하 국군의 전상환자를 치료하는데 협조해 준다면 병원과 의대의 인원 및 기재를 전부 부산까지 후송해 주겠다고 제의해 왔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일각이 여삼추였다. 나는 서울대학교 임시관리책임자 김두창박사와 낙준문교부장관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했다.
이들도 다 응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지 않겠느냐고 승인해주었다.
그러나 이 「결정」이 나중에 함춘원에 불미스런 잡음을 일으키고 잠시나마 나를 번민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할줄 어찌 예측이나 했으랴.
어떻든 해군수송선1척과 기차화물차량11량을 얻어 현미경3백대(적이 후퇴하면서 급해서 땅에 묻어두고간 것)를 비롯해 치료도구·약재·의학도서 및 의사·간호원·학생등 2백여명을 부산까지 후송시키는데 성공했다.
한편 이때 전화에서 국보 이조실록을 구해낸 것은 일생의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처음 나는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있는 이조실록선질을 후송하는 일을 놓고 몹시 망설였다. 당시 군당국으로부터 의료관계 장비 이외는 일체 운반할 수 없다는 엄명을 받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도 방편을 차리신다지 않는가. 국보를 구하는 일이 옳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조실록 전질을 몰래 의학도서에 끼워 후송을 감행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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