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김동익>(2312)-<제59화>함춘원시절-김????(2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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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8·15해방이후 일시 혼란의 와중에서 자칫 기능이 마비될 뻔한 함춘원의 질서를 바로잡고 수습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가운데 명주완 박사가 대표급으로 꼽힌다.
인식부족으로 비인간적인 학대와 사회적으로 버림을 받는 정신과 환자들의 건전한 사회인으로의 복귀를 위해 일생을 바친 명박사의 공적은 아무리 기려도 부족할 것이다.
뿐만 아니다. 명박사는 다소 불안정한 서울시 의사회와 대한의학협회의 기틀을 마련한 공로자이기도 해, 말하자면 그는 우리 의학계와 의료계의 대들보인 셈이다.
작년 그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 남달리 애석함과 슬픔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은 함춘원을 정비하고 확장할 때 그와 맺었던 인연 탓이다.
6·25동란은 우리민족의 비극이었지만 당시 크게 낙후되었던 우리 의학이 새로운 모습으로 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함춘원에도 혁신의 바람이 일었다.
환자를 진료하기에는 병원의 시설이나 기재들이 너무 낡았다. 의학교육도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이때 명박사는 서울대의대학장이었고 나는 병원장을 맡고 있었다. 우리는 매일 만나 머리를 맞대고 함춘원의 혁신을 위해 지혜를 짜냈다.
「ICA·미네소타」원조계획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선진시설과 장비를 도입해오고 교수들을 미국에 유학시키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는데 나는 당시 명박사의 예리한 현실분석과 합리적인 판단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미국내 유수한 외과대학과 병원 및 의학연구기관을 시찰키 위해 명박사와 함께 3개월간 미국여행을 같이 했을 때 그의 치밀·명석한 두뇌와 마치 「컴퓨터」같은 암산능력에 모두들 감탄하던 일이 머리에 떠오른다.
명박사는 30년에 성대졸업 후「스기하라」(삼원)약리학교실에 들어가 4년동안 연구하고 정신과 「구보」(구보희대)교수 밑에서 정신과학을 연수한 정통파로서 우리나라 정신과학의 개척자다.
해방 후 경성대학의학부와 서울대학교 외과대학의 정신과 교수겸 초대병원장으로서 혼란기의 병원살림을 꾸렸다.
6·25로 군에 입대했다가 전후 대학에 복귀해서 1956년부터 60년까지 서울대의대 학장으로 함춘원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그는 의학계뿐만 아니라 의료계 전반의 육성·발전을 역설했는데 1964년 서울시 의사회장직을 계기로 의사들의 단체를 정비·강화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래서 66년부터 70년까지 대한의학협회회장을 지내는 동안 의사들의 권익신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말년에는 조선대의대 부속병원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그의 장남 명호진 박사(58년 서울대의대졸)가 서울대학병원 신경과 과장으로 대를 이어 활약중이다.
박건원 박사도 성대 제1회 졸업생 가운데 김성호·명주완 박사와 함께 나의 기억에 생생한 후배다. 1931년 내가 대학병원 전염병동의 주치의로 근무할 때 일이다.
졸업 후 「오가와」(소천)외과에서 수련하던 중 장「티푸스」에 걸린 박박사는 전염병동에 입원했는데 항생제가 없던 때라 생사지경을 헤매다가 장출혈이 생겨 그야말로 촌각을 다투는 중태에 빠졌다.
당시 장래가 크게 촉망되었던 그를 살리기 위해 나는 민병기 박사(전 내무부장관)와 함께 이틀밤을 꼬박 새워가며 필사적으로 치료했던 것이다.
해방 후 박박사는 강원·전남도지사를 지냈고 공군에 입대해서 의무감 등으로 활동하다가 60년에 공군준장으로 예편됐다.
서울대의대 동창회장·대한의학협회 이사장·한국자동차보험고문 등 최근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활동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더니 그도 끝내 작년에 작고했다.
이들을 회고하면서 김성진 박사는 이역만리 미국에 가있고 명주완·박건원·민병기박사 모두 지계한 이 세상에 유별나게 나의 감회만 남아있으니 인생무상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공연한 감상에 빠지는 바람에 이세규 박사를 잊을 뻔했다.
졸업 후「오오자와」(대택)약리학교실에서 연구생활을 하고 「세브란스」의전약리학교수·이화의대약리학교수·이화의대학장·이대대학원장을 지내면서 우리나라 약리학의 발전과 후학양성에 이바지한 그의 공로는 지대하다고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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