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2306)-제59화 김소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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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세브란스」출강>
나의 이른바「혁명적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꼭 한마디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건이 있다.
「세브란스」가 나를 내과교수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이다.
나의 꿈은 대학교수였다. 대학에서 내과 학을 강의하고 연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싶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서 새로 세워진 경성상대 의학 대에서는 우리한국인을 교수로 채용하지 않았다. 특히 임상분야에서 교수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우선 나는「이와이」내과에서 연구생활을 하면서 1934년1월5일부터 35년5월20일까지「세브란스」의 강사로서 내과강의를 맡았다.
당시 서울역 앞에 자리잡고 있던「세브란스」병원은 다분히 관료적이고 권위를 내세우는 경의전과는 달리 비교적 자유스런 분위기였고 한국인 학생들도 활기에 차 보였다.
「세브란스」가 처음으로 학생을 모집한 것은 1899년이었는데 첫 졸업생을 배출한 것은 1908년이었다. 경의전 전신인 대한의학교보다(1902년)6년 뒤의 일이다.
그 제1화 졸업생 7명의 명단을 소개하면 김희영·김필정·박서복·신창희·주현직·홍석후·홍종은 등이다.
이렇듯 유서 깊은「세브란스」에 출강하는 나의 기쁨은 실로 컸고 부풀어오르는 기대로 나의 젊은 가슴은 터질 듯 했었다.
그때 학생가운데 김형윤(전 의협 기획이사) 민광유 (전「세브란스」의대학장·의무부 총장),박석련(전 한양대 의대 병원장), 설경성(전「세브란스」의대 산부인과 교수) , 계종덕 (부산 서외과 개업·국제「로터리」지구총재) , 이재규(전 국제「라이언즈」협회지구 총재)등 70여명의 훌륭한 의사가 배출되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청출어람이 승어람」이란 말이 있듯이 이분들이 나보다 모두 훌륭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렇듯 출강 경력도 있는 터인지라「세브란스」내과 교수가 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이와이」교수도 나를 적극 추천해 주었다.
게다가 약리학의「오오자와」(대택승)교수가 주선을 해 주었다. 그는 당시 오경선「세브란스」교장의 고문역할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정도의 영향력은 발휘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오경선 박사도 나를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던 것으로 기억 된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세브란스」는 나룰 내과교수로 임명할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 참으로 낙심천만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의 실망은 컸다. 아무리 곰곰 생각해도「세브란스」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당시「세브란스」와 경성제대의 학부는 경쟁하는 상대였지만 그것이나를 거절하는 이유가 될수 없었다. 우리 선배인 심호섭 박사(내과 학)와 이석신 박사(의화 학)가「세브란스」의 교수로 재직 중이었으니까.
또 나는 그때 당시 명성을 떨치「이와이」교수의 제자니까 학문적으로도 반대할 이유가 못되었다.
그런데도「세브란스」의 내과교실에서 한사코 반대해서「세브란스」교수취임의 바램은 무산되고 말았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그 반대 이유가 나의 이른 바「혁명적 결혼」이었다고 한다.
나도 그들이 내세운 반대이유에 대해 일단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나의 결혼은 당시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 혁명적인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세브란스」내과교수반대사건은 나의 인생행로를 수정하는데 중요한「모먼트」가 되었다.
나는 굳게 결심했다.
앞으로 더욱 노력해서 보람된 일을 해보겠다고.
우선 나는 후배들에게 길을 틔워주기 위해 개업의로 나섰다. 10년 동안 나의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진료했다.
그렇다고 대학교수가 되고 싶은 꿈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8·15 해방을 맞아 대학이 우리를 필요로 할때 나는 즉시 대성황을 이루던 병원을 전부 버리고 대학으로 복귀, 내과교수로 활약했다.
이러한 용단을 내릴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두말할 나위 없어 결혼 때문에 반대를 당했을 때의 굳게 다짐한 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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