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의 취리히통신] '분리는 대박' … 독립에 목숨 거는 스페인 바스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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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테러리스트 그룹 ‘ETA’가 2011년 10월 무장 투쟁을 중지하고 합법적 독립운동을 하겠다며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지난 40여 년간 이 조직의 테러로 800명 이상이 숨졌다.

제겐 사라 린콘(33)이라는 스페인 친구가 있습니다. 지금은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회사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죠. 집이 가깝고 제 남편과 국적도 같아 금방 친해졌습니다. 사라를 볼 때마다 신기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제가 아는 다른 스페인 사람들과 공통점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는 과묵합니다. 떠들썩한 파티에 가서 한마디도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웃고 수다 떠는 게 전문인 대다수 스페인 사람들과 대조적이죠. 하지만 정치·사회 이슈가 등장하면 갑자기 투사(?)로 돌변해 의견을 내놔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자세히 보면 외모도 조금 달라서, 스페인 여성치고는 키가 크고 눈썹이 두터운 편입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그는 ‘아틀레틱 빌바오’ 팀의 열렬한 팬인데, 그 자신이 스페인 북부 도시 빌바오 출신이거든요.

 왜 사라가 보통 스페인 사람들과 다른지 눈치채셨나요? 그의 고향 빌바오는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중심 도시입니다. 바스크 지역은 스페인 내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분리 독립’을 외치는 곳이죠. 불과 얼마 전까지도 이곳을 기반으로 한 ‘ETA’라는 테러리스트 그룹이 독립을 주장하며 활발히 활동했었습니다. 바스크는 지역적으로 프랑스와 맞닿은 피레네산맥 서쪽에 위치해 있고, ‘에우스카라(Euskara)’라는 고유의 언어를 씁니다. 놀라운 건 이 언어가 스페인어나 프랑스어와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유럽의 어떤 언어와도 문법적 공통점이 없는 고립어라는 겁니다. 언어학자들은 이를 두고 유럽에서 인도유럽어가 퍼지기 이전에 쓰였던 언어가 살아남은 것이라고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바스크가 고립된 건 언어 말고 또 있습니다. ‘유전적 바스크인’은 외모가 스페인 여타 지역 사람들과 확연히 구분됩니다. 길게 뻗은 코, 두터운 눈썹, 강한 턱뼈 등 딱 보면 바스크 출신인 걸 알 수 있죠.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 나오는 실존 인물 달타냥,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 등이 바스크 유전자를 갖고 있습니다. 2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순수 바스크인’의 약 85%가 Rh- 혈액형이라는 점은 ‘바스크 신화’로 불리며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죠. 이러한 특수성에 대해 바스크인들은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오죽하면 아틀레틱 빌바오 팀 선수들이 순수 바스크인으로만 구성돼 있을까요.

 이미 스페인 내에서 자치권을 얻고 있는 바스크 지역이 완전한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건 이런 특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숨은 이유가 있습니다. 산업이 발달한 바스크 지역의 1인당 평균소득은 4만457달러(2012년). 스페인 평균(3만722달러)을 한참 웃도는,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입니다. 바스크 민족주의자들은 ‘왜 인종, 언어가 다른 스페인 사람들을 우리가 먹여살려야 하느냐’고 하는데, 이해가 갈 것도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과 달리, 바스크인에겐 ‘분리는 대박’인 셈이죠. 스페인에서 분리를 외치는 또 다른 지역, 카탈루냐 역시 부유한 지역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물론 저변엔 아픈 역사가 깔려 있습니다. 피카소의 저 유명한 작품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에 의해 폭격당한 바스크 지역의 작은 마을을 담은 그림입니다. 프랑코 독재 시절엔 바스크어를 쓰는 게 금지됐고, 새로 태어난 아기에겐 바스크 이름을 붙여줄 수 없었죠. 독립을 외친다는 이유로 수많은 바스크인이 처형당했고요. 일제시대의 조선과 비슷한 상황이랄까요. 사라의 할아버지도 1960년대를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단지 바스크인이란 이유로 희생당한 우리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빌바오엔 널렸어. 왜 독립에 목숨 거냐고? 밟을수록 더 꿈틀거리는 게 본능이거든.”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도 이처럼 오래 얽히고설킨 역사와 정치, 경제 문제가 수면으로 드러난 결과입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영국의 스코틀랜드 등에서도 분리주의 바람이 심상찮습니다. 자, 이제 우리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질 차례입니다. ‘통일은 대박’일까요, 아니면 ‘한민족’이란 그저 ‘상상의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에 불과한 걸까요.

김진경 jeenkyung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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