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勢의 흑이 노리는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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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제37기 왕위전 본선리그 제1국
[제4보 (53~70)]
白·李世乭 6단 | 黑·朴正祥 3단

(53~70)=이세돌6단은 긴 손가락으로 판의 모서리 부근을 토닥거리며 판을 쏘아보고 있다. 참 신기한 청년이다. 길고 갸날픈 몸매 어디에 그처럼 사나운 야성이 숨어있는지 진정 모를 일이다.

어린이대회였던가. 멀리 비금도에서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의 모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러닝셔츠 바람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 고양이처럼 거리를 둔 채 반짝이던 눈….

우하에선 이세돌의 의표를 찌르는 한칼에 흑의 귀가 뭉텅이로 떨어져나갔다. 고개를 숙인 채 장고를 거듭하던 朴3단이 53으로 찔렀다. 흑?를 버리려는가 싶을 때 55로 어깨를 짚었는데 이 수순이 의외로 날카롭다.

속기의 李6단도 잠시 머뭇거렸지만 56은 어쩔 수 없다. 순간 57과 59가 백의 자충을 유도해 멋지게 탈출에 성공했다. 부분적으론 성공한 모습. 그러나 귀를 잃은 충격 탓인지 그의 표정은 우울하다.

검토실의 임선근9단이 기보를 놔보다가 "요즘 바둑은 포석이 없어요"하며 웃는다. 바둑판은 처음 좌하에서 불이 붙더니 하변을 빙 돌아 우변쪽으로 번져가고 있다.

산불처럼, 또는 백병전을 벌이는 병사들처럼 판을 빼곡하게 메우며 번져가고 있다. 요즘은 포석에서 바로 먼지 자욱한 전투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예전엔 '대세감각'이 중요한 덕목이었다면 지금은 '전투감각'이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됐다. 지독한 전투 속에서 우선 살아남아야 대세도 있다는 얘기다.

비틀거리던 흑? 한점이 살아나오자 주변의 백이 약점을 드러낸다. 중앙 백 대마도 약하고 우변 백도 조금 허술하다.

귀에도 '참고도1'의 흑1로 두는 수가 생겼다. 백이 2로 막아 강하게 두는 것은 흑7까지 백 전체가 피곤해진다. 그렇다고 '참고도2'처럼 양보해야 한다면 상당한 타격. 이것이 중앙으로 도망치는 흑의 노림이다.

68,69로 서로 보강할 때 李6단의 70이 A의 연결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가 어찌 A와 같이 속된 수로 연결을 도모할 수 있을까. 한국 바둑 '3대 장고파'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朴3단은 끝없이 장고를 거듭하고 李6단은 지친 듯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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