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밭에 심은 묘목 옮길 곳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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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내년 1월로 시한을 남겨놓은 논·밭에 심겨진 묘목의 이전 문제는 묘목을 가꾸는 농민이나 이를 파헤치라는 당국이나 아무 대책도 없는 채 초조하게 시한이 다가 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논·밭에 심은 묘목이 문제가 된 것은 75년 정부가 「농지의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을 개정하면서 3년의 시한을 주고 묘목을 심은 논·밭을 모두 원상 회복시키도록 한 때문.
그 시한이 바로 내년 1월31일이다.
이 법률에 따라 경사 8도30분 이하, 면적 6백평 이상의 밭이나 1백평 이상의 논에 심겨진 관상수 묘목은 모두 뽑힐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시한이 넘으면 정부가 대집행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에 산재한 대상 논·밭은 1천8백 정보. 여기서 자라고 있는 묘목은 줄잡아도 4천만 그루에 달한다.
한국 관상수 협회가 대상 논·밭 61만평에 대해 실시한 이전 비 부담 조사에 따르면 이식 비 13억3천7백만원, 고사목 발생 (10%)에 따른 손해 5억6천6백만원 합계 19억3백만원의 손실을 안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대로라면 전국 1천8백 정보에 있는 묘목을 옮기는데는 1백70억원의 부담이 따른다는 계산이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옮길 곳이 없다는 점이다.
옮길 곳은 산뿐인데 묘목을 산에 가꾸려면 개간을 해서 밭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산지의 개간은 엄격히 제한돼있다.
결국 묘목을 없애라는 얘기 밖에 안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농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한이 다가오는 것을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시흥군의 경우 대상 면적 30정보 중 지난 20일 현재 이전을 끝낸
곳은 10%에도 미달된다.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1천5백평의 밭에 관상수를 가지고 있는 임인식씨의 경우 당국에서 나무틀 옮기라고 독촉이 심하나 옮길 곳이 없어 농지까지 함께 팔려고 내놓고 있는데 그나마 원매자도 없다는 것.
시흥군 과천면 문원리 이창룡씨는 68년에 2천명의 밭에 「가이스까」 옥향 오엽송 등을 심어 놓고 있다. 이씨는 여주에 야산 2만평이 있으나 이전비가 묘목 값보다 더 들어 옮길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결 같이 자라는 나무를 뽑아 옮기라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지적하고 정부가 대집행을 해서 뽑아 버리는 경우 그 손실을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이냐고 반문하고 있다.
관상수 협회 조사를 기준으로 하면 전국의 대상 묘목을 모두 뽑아 버리는 경우 그 손해는 4백3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계 되고 있다.
이러한 손해는 직접적으로는 재배 농가가 입는 것이지만 크게 보면 국가적 손실이다.
김완식 관상수 협회 전무는 한때 국가에서 장려까지 해놓고 이제와서 아무 대안도 없이 묘목을 뽑으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하고 비록 법률이 정한 일이라 하더라도 멀쩡한 묘목을 뽑아 버리는 것은 국가적 손실인 만큼 강제 집행은 보류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 조림가협회 김형기 회장도 묘목에 대한 수요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다 올해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산에 심은 묘목의 70%가 고사했기 때문에 앞으로 묘목의 공급이 큰 문제라고 우려하고 있다.
이런 형편에서 기천만 그루의 묘목을 뽑아 버린다는 것은 수십년간 국가적으로 추진해온 산림 녹화 사업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이 늘어가는 시가지·공단의 조경 사업에도 큰 차질을 가져오리라는 것.
그는 정부가 농지의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을 개정할 때만 해도 우리의 식량 사정이 넉넉지 못했으나 이제는 정부가 한해 상습지를 밭으로 바꾸어 특용 작물의 재배를 권장할 정도가 되었다고 말하고 특용 작물로서는 토지에 따라 다년생 작물 또는 묘목이 훨씬 수익성이 높은 만큼 이제 새삼스레 묘목을 뽑으라는 것은 이 같은 정부 방침에도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당국의 재고를 촉구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빌 것도 없이 논·밭에 심은 묘목의 처리는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뽑은 묘목은 어디로 옮기라는 말이며 무조건 뽑아 버린다면 묘목의 부족 사태에는 어떻게 대처하겠다는 것인지 답답한 일이다.
당국에서도 문제점이 있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행정 일선에서 이 문제를 맡고 있는 이성용씨 (경기도 시흥군 농산 과장)는 『정부가 법으로 정한 일이므로 대상자들에게 독촉은 하고 있으나 시한이 되어도 옮기지 않을 경우 과연 대집행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라고 밝히고 『문제점을 보고, 대책이 시달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주무부처인 농수산부의 김재정 농산 국장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 동안 한해 대책에 쫓겨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밝히고 『아직 시간 여유가 있는 만큼 문제점을 분석, 합리적인 대책을 강구해 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제로 시간 여유가 많은 것은 아니다. 앞으로 묘목을 옮길 수 있는 시기는 오는 가을뿐이다.
정부는 이일이 개인 재산권의 침해, 녹화 사업의 추진 등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을 인식, 때늦은 후회가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특별 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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