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적정 종합 판단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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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적정 종합 판단서」-. 육군 본부 정보국의 작전 정보실이 작성, 49년12월28일자로 상부에 보고한 군사 정보 기록이다.
6·25 발발 6개월 전에 적의 남침을 예고한 이 판단서가 상상조차 못 할 비극을 경고했는데도 비극은 막아 지지 않았다.
당시 작전 정보실은 박정희 대통령이 소령으로 실장을 맡고 그 아래 북한반에 김종필 김정숙 엄용승 중위 (두사람은 전사), 남한반에 이영근 (유정회 총무) 서정순 (행정 개혁 위원장) 한무협 (동방 화재 보험 사장) 함덕윤 중위 (전사) 등 하급 장교들이 근무했다.

<2백 항목의 보고>
그해 12월초 박 실장은 부하 장교들에게 북쪽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종합하는 정보 수집을 긴급 지시했다.
20여일만에 「연말 종합 적정 판단서」가 김종필·이영근 중위에 의해 공동 작성 됐다.
김 전 총리는 『이 판단서는 북한 괴뢰 집단 안의 정치·경제·사회 부문과 군사 외교, 특히 남침을 위한 북한의 준비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여 그 기획을 해석·평가한 2백 항목에 달하는 방대한 보고서』라고 설명했다.
김 전 총리와 이영근 총무는 이 판단서 중 남침 기도를 판단한 결론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①북한은 49년 말까지 전쟁 준비를 이미 완료했다. 적의 병력은 전차 1백50대, 항공기 2백여대, 각종 포 2천여 문으로 장비를 갖춘 10개 사단, 약 19만명으로 판단된다.
②적의 남침 시기는 50년3월께로 판단되나 동북한 중공군 출신의 의용군 편입이 지연될 경우 6월로 연기될 가능성도 있다 (동 북한 의용군이란 모택동 산하에서 대일 전에 참가했던 한인 부대로서 2만명이 넘었으며 중공 정권 수립 후에 즉시 북한에 옮겨가도록 마련돼 있었다).

<중공 개입도 예견>
③적은 의정부∼서울 선에 전차 사단을 포함한 3개 사단 이상의 주공을 펴고 개성∼서울 선과 춘천∼원주 선에서 각각 l, 2개 사단이 조공을 할 것이며 옹진과 주문진 방면에서 각각 견제 공격을 할 것이다.
④적은 2, 3개월 이내에 남한 전역을 석권하기 위해서 전 병력을 일제히 투입할 것이다.
⑤적의 전차는 아군에 대한 결정적 위협이 될 것이며 공중 지원과 해상 유격대의 상륙 침투가 병행 될 것이다.
⑥적은 전면 침공 일까지 후방 교란 요인을 계속 조성할 것이다. 아울러 공격에 앞서 남침 기도를 은폐하기 위해 평화 정치 공세를 더욱 치열하게 펼칠 것이다.
⑦소련의 직접 개입은 없을 것이나 중공은 직접 지원할 가능성이 있다.

<보고서는 소실 돼>
이 적정 판단서는 정보 국장이던 장도영 대령을 거쳐 채병덕 참모총장·신성모 국방장관에게까지 올라갔고 주한 미 군사 고문 단장 「로버츠」 준장에게도 제출됐다.
6·25 발발전인 5월10일 기자 회견에서 3일만에 백두산까지 진격할 수 있다고 호언한 신 장관이나 『우리가 북진을 개시하면 1주일 안에 신의주까지 밀고 나갈 것』이라고 했던 채 장군에게 적정 판단은 무시됐다.
이 총무는 『미 고문단도 남침의 경우 주공·조정의 방향에 대해서만은 긍정적이었으나 적의 병력·장비 특히 남침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면 부정적이었다』고 했다. 『늦게나마 6·25 한달 전인 50년5월 국회에 38선 방어 진지 구축비를 책정하라는 긴급 건의서를 제출했으나 5·30 선거 때문에 휴회 중이어서 그나마 처리되지 않았다』고 했다.
박 소령의 지시로 작성된 판단서는 나중의 결과가 입증했듯이 당시 적정을 정확하게 적중시켰으면서도 상부에서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은 채 묵살됐고 6·25 동란 중에 판단서도 소실돼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70년엔 박 대통령도 당시 신범식 문공부장관에게 지시해 찾아보도록 했으나 발견 못했다. 작전 정보실의 이 같은 남침 예고는 6·25가 발발하기 하루전인 6월24일에도 이뤄졌다.
토요일인 이날 서정순 중위 대신 당직을 맡았던 김종필 중위는 사태가 긴박함을 느끼고 이영근 함덕윤 중위와 함께 (박 실장은 모친상을 당해 구미에 내려가 있었다)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에게 말해 인사국장 강영훈 대령,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군수국장 양국진 대령 등에게 정보실에서 긴급 적정 「브리핑」을 했다.
『언제라고 짚을 수는 없지만 금명간에 북괴가 공격해 올 것』이라고 분석, 장 국장은 38선 일대에 배치된 HID (첩보대) 대장을 즉각 상경시켜 결사 정찰대를 그날 밤 안에 출발시켰지만 이미 때는 늦어 몇시간 후엔 비극이 시작되고야 말았다.
『당시 유비무환으로 대응했더라면 비극의 상황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말하는 이 총무는 『적정을 정확히 파악해 대비하는 것이 오늘에도 필요한 역사의 교훈』이라고 말한다. 【한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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