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의 통화관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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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경제안정의 필요성을 특히 강조한 신임 한은총재의 경고는 매우 적절한 시기에 제기되었다. 성장 정책은 안정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유의한다는 중앙은행 총재의 신념은 일견 너무도 새삼스러운 것 같지만, 경제 정책의 주류가 성장지향으로만 경사되어 온 환경에서는 고고의 일성으로 정책 당국자들이 귀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 안정 없는 성장이 지속될 수 없다는 이 단순한 논리의 확인이 만인에게 마음 든든한 감명을 주게되는 소이는 결국 우리 경제의 기조가 그만큼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운영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개발초기에는 이른바 개발「인플레」불가피론까지 동원될 만큼 실물 경제의 확대가 긴요한 과제가 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경제성장의 정치적 함축까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물경제가 어느 정도 기틀을 잡아 수급의 대강이 맞아가고 국제수지도 거의 균형화에 접근하고 있는 시점에서는 경제 운영의 방향이나 정책 수단에도 큰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 전환의 핵심은 대내·대외 경제관계의 새로운 정립이나 산업구조의 재편성을 통한 고도화 등 여러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으나 요컨대 그것은 한마디로 안정과 성장의 새로운 조화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것은 일견 해묵은 명제같이 보이나 지금 같은 시기, 실물과 통화의 괴리가 심화되고 국제수지의 호전에 따른 급격한 통화 팽창이 경제를 교란시키는 시점에서는 전혀 새로운 측면에서 이 양자의 조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가장 중요한「포인트」는 역시 신임총재가 지적했듯이 실물의 확대세를 앞지르지 않도록 통화신용의 절제를 강화하는 일이다.
다만 이 경우 물리적인 양적 통제가 아니라 실물경제의 움직임과 밀접히 연관되면서 한편으로는 투자·생산·소비를 적절히 규제할 수 있는 정도로 총수요 관리가 고도의 정치성을 지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수요관리의 관건이 되는 재정은 물론 외환무역 금융에서 서로 조화를 이룬 안정 정책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보다 먼저 유사한 전환기를 거친 서독·대만의 경험에서도 배울 수 있다. 경기 조정특별계정을 설치하고 투자, 소비, 수출에까지 부가세를 적용했던 서독의 경우는 안정 정책의 극치를 보는 느낌이다.
전환기의 경제 안정에 대한 이 같은 굳은 신념이 오늘까지 서독경제의 견실한 밑바탕이 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와 똑같은 양곡계정 적자를 안고 있는 대만이 총 재정 흑자를 10여 년간 유지할 수 있는 기적 같은 비결도 따지고 보면 단순하다. 재정긴축의 굳은 신념으로 일체의 예산추가나 경정유혹을 뿌리친 데 불과하다.
지난해 이후 해외부문의 급격한 통화팽창으로 야기된 「인플레」소지에 연초부터 투자·소비추세가 점차 과열로 치닫고 있는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경제안정에 대한 범국민적 신인의 회복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 스스로 절제를 수범해야 한다. 정부는 뜻대로 하고 싶은 일을 다하면서 통화 수속은 민간부문에만 강요하는 파행적 총수요 관리는 결국 「인플레」의 만연과 중소 기업 도산이라는 불균형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중앙은행 총재의 신중한 경고를 모두 한번쯤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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