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를 때린 고교중퇴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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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너무도 충격이 큰 사건이라고 밖에는 달리 할말이 없다.
퇴학 맞는데 앙심을 품은 17세의 고교중퇴생이 수업중인스승을 소주병으로 때려 중상을 입힌 사건은 심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청소년문제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절감케 해 주고 있다.
아무리 옛날의 사제의 도와 오늘의 그것이 같을 수 없다 하더라도 제자가 스승을 때리게까지 됐다는 정황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스승과 제자는 보다 값진 인간의 상을 찾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같은 길을 가는 동행자임에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이 도정에서 한 걸음 앞선 스승은 그 뒤를 따르는 제자를 끌어올리고 제자는 스승을 존경하며 스승이 밝혀주는 불빛의 힘을 입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사제의 관계를 부자의 관계와 같은 차원에서 사부일체로 파악한 전통적 사고도 스승과 제자와의 사이에 이 같은 사랑과 존경을 전제한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일부나마 사제의 윤리가 오늘처럼 천박하게 변질되기에 이른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상황과 관련하여 야기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질서·규범·관습에 아랑곳없이 돈이나 권력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풍조가 지배하는 일종의 도덕적 「아나키」상태가 노정하고 있다. 『무엇으로써도 이것만은 범할 수 없다』는 도덕적 금기의식이 결여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사제의 윤리도 이처럼 타락된 세태의 영향을 면할 수는 없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금기의식이 결여된 사회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때리지 못 할 리가 없다. 이 보다 더 심하고 파렴치한 일들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답지 못한 제자가 나오게된 배경에는 스승답지 못한 스승이 있고,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비행청소년 문제도 결국 그 책임은 나라와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어른들에게 있음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우기 기성 층은 엉뚱한 짓을 예사로 하면서 청소년들에게는 공부를 않는다, 반항만 한다, 친구들하고만 어울린다 하면서 혈기왕성한 이들을 지나치게 억압하고, 또 힘에 겨운 많은 일들을 일방적으로 요구한다.
학교에서는 청소년들에게 인간교육은 제쳐놓고 입시준비 교육만 강조한다.
이리하여 학생들은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긴장·불안·초조감에 시달리지만 「스트레스」를 발산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현재의 고등학교는 옛날의 병영처럼 학생들을 3년 동안 잡아두고 수험준비라는 고된 훈련을 시키는 장소로 인식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청소년 비행예방을 위해 지도·단속 등 감시태세를 강화해도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고 ,무엇인가 때려부수고 싶으며, 누구엔가 반항하고 싶은 병영의 「내무반」적 갈등이 일게 마련이다.
문제의 퇴학생이 담임교사도 아닌 다른 반 교사에게 행패를 부린 것도 이 같은 「내무반」적 갈등이 빚은 신경증적 발작이라고 본다면 지나치다 할 것인가.
이렇게 볼때 이번 문제를 일으킨 학생을 나무라고 벌주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청소년문제는 바로 그들을 교육하고 기르는 학교와 사회, 그리고 성인들이 빚어내고 있는 문제라고 보는데서 비로소 그 진정한 해결책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문제 해결에는 먼저 흐트러진 사회도의와 규범이 확립돼야 하고 이와 함께 청소년에게 가해지고 있는 사회 및 교육의 압력을 완화해 주기 위한 노력과 대책이 강구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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