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발로자를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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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자를 위하여/송영 지음, 창작과 비평사, 8천원

"문명의 진보와 선행에 관한 인간의 의지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 것 같다. 축제 개막을 기다리듯 초침을 재가며 전쟁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국토 전체가 인류문명사의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라크 땅에 최신의 무기들이 엄청난 폭탄을 퍼부을 거란 뉴스가 매일 지면을 장식한다. "

중진 작가 송영(63)씨가 8년 만에 신작 소설집인 이 책을 내놓으며 밝힌 '작가의 말'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직전에 쓴 이 말대로 수백.수천기의 미사일이 이라크에 떨어지며 4대 문명의 하나인 수메르 유적 등 인류 문화재가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

초토화 공습으로 바그다드 함락 시간을 점치며 유가와 주가가 요동치는 문명과 경제의 야만적 현실 앞에서 세계의 지성들은 치를 떨고 있다.

이 소설집은 걸프전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라크를 여행하며 1995년 발표한 중편 '모슬 기행'을 비롯해 9편의 중.단편을 싣고 있다.

캐나다로 이민한 화가 김정은 한국의 풍경을 그리고 싶어 다시 서울로 와 그림을 그리다 일행 셋과 함께 이라크 여행을 떠난다. 한 지방 축제 참가가 명분이었으나 현대 문명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고대문명, 그 원초적 에너지를 보기 위해서다.

여행 중 김정은 순수하고 귀티나는 이라크 여대생 로라에게 깊이 매료된다. 이라크에 귀화, 로라와 같이 살겠다는 깜냥에서 일행으로부터 실종된 김정이 끝내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다는 것이 '모슬 기행'의 줄거리다.

그러나 송씨 소설의 맛과 깊이는 이야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간과 정황에 있다. 동료들에 비해 서울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40대 화가 김정의 로라라는 때묻지 않은 처녀로 대변되는 원초적 문명의 순수함이 살아있는 이라크에서의 새 삶.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할지라도 이라크의 아름다운 유적지와 그곳의 순수한 사람들을 통해 그러한 삶도 꿈꾸며 현실적 삶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 소설 아닌가.

또 하나의 화제작은 표제작 '발로자를 위하여'다. 러시아 여행 중인 소설의 화자는 러시아의 청년 동양학 학도 발로자를 통해 비록 혼란과 몰락의 길을 걷고 있지만 러시아의 소박하면서도 문화적인 자긍심과 인간적 예의를 그리고 있다.

화자의 첫 여행 안내자로서 만난 발로자, 그후 서울에서의 만남과 발로자의 고향 페테르부르크에서의 만남으로 이어지며 발로자는 한국에서 한국인 처녀와 결혼해 호주로, 모스크바로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떠돈다.

그러면서 화자에게 '다음에는 꼭 좋은 소식 전하겠다'며 안부전화를 끊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 발로자가 경희대 러시어학과 교수였으며 '당신들의 대한민국'등의 저서를 펴냈고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로 있는 박노자씨다.

소설 속의 화자는 다름 아닌 송씨며 박씨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고 경희대 교수 자리도 알아봐 줬으며 지금도 국적과 나이를 뛰어넘어 멋진 우정을 나누고 있다.

송씨는 해외 여행 중 직접 만나 감명받은 발로자와 이라크 여대생 로라 등을 소설의 인물로 삼으며 지금은 무너져 가는 문명의 자존, 인간적 예의로서의 이라크와 러시아를 안쓰럽고도 아름답게 이 작품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경철 문화전문기자
사진=임현동 기자<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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