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문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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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한때 「카프 운동」에 참여했던 박영희(시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며,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이었다.』
이것은 1920연대 이른바 「프로문학」운동의 선두에 섰던 박영희의 전향 선언이다. 이 무렵의 「프로문학」은 「카프」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KAPF는 「코리아·아티스트·플롤레타리아·페더레이션」의 약자.
이「서클」은 『문예운동』『예술 운동』등 문예지를 발간하며 계급성을 내세운 정치의식의 문학을 깃발로 흔들었었다.
1934년 일경에 의한 「카프」 검거 선풍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1933년 박영희는 7년만에 「카프」를 탈퇴하며 고배를 들듯 그 유명한 말을 남겼었다.
우리 문학사에서 「카프」가 주조를 이루었던 연대는 1925년 7월부터 1935년까지의 10년. 이들이 붕괴된 데에는 몇가지 원인이 있었다. 일경의 탄압에 의한 외적 상황도 적지 않게 작용했지만, 내부에도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문예 운동이 「계급적 혁명」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성토가 끊임없이 제기된 것이다. 따라서 문학 운동의 조직에도 문제가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그 전개 방법조차도 보조가 맞질 않았다.
달리 생각하면 「기름과 물」의 화해가 끝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도 같다. 박영희의 경우는 낭만주의 문학을 지향하는 「백조」동인으로 활약했었다. 하루아침에 핏발이 선 눈을 하고 「프로문학」에 뛰어든 일은 아마 그 자신도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자기 모순이었을 것이다.
최근 「파리」에서 열린 「유럽」한국학회 총회에서 북한문단의 현황을 엿볼 수 있는 보고가 있었다고 한다. 새삼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오늘의 북한에선 「카프」시대의 「프로문학」만을 문학사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문학을 인간의 생존 상황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이데올로기」의 도구나 「액세서리」로 생각하는 것은 공산주의 세계에선 별로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삭막한 상황 속에서의 삶이다. 예술이 벌써 무엇의 도구로 전락한 상태에선 삶의 의미도 보람도 없을 것 같다.
「셰익스피어」는 시대와 인종과 국경을 넘어 「셰익스피어」로 남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러시아」인 만의 것은 아니다. 오늘의 소련체제에서 그를 찬양하든 안하든, 그는 인간의 작가로 남아 있다.
역사의 단절은 역시 우리 문학사에서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최근 월북 작가의 작품 연구를 허용한 것은 그런 점에선 크게 다행한 일이다. 북한만은 더욱 더 「단절된 세계」로 밀폐되어 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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