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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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월부터 「이달의 문학」은 보다 객관성을 살리기 위해 분야마다 문인 5명의 단평으로 소개한다. 【편집자주】

<문덕수(평론가)>
조영서씨의 『겨울지평』(문학사상)이 우리에게 기쁨의 공감을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시에 보이는 겨울 아침·골목·한 마리 새·십자가·눈보라 등은 현실에 휘말려서 오염된 언어가 아니라 그러한 오염을 말끔히 씻어버린 순진무구한 언어들이다. 삶의 추구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오염된 언어세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이 작품의 영상은 그대로 어떤 원소적 미의식으로 짜여져 있다. 뿐만 아니라 주제구성의 관념화를 배제하는 탄력성, 생동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어 이 달의 시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았다.

<주문돈(시인)>
강우식씨의 『양파』(심상)는 강씨의 사행시가 이제 그 독특한 표현방법과 내용으로 강씨 특유의 체질로 완전히 정착했음을 보여 주었다.
이 작품은 이제까지 그의 작품에서 풍기던 서정적이고 토속적인 분위기가 가셔지고 짙은 고발정신이 강조돼있다.
그러면서도 한가닥 회의와 고적감이 뒤에 도사려 그 나름대로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함께 발표한 『배추』도 같은 계열의 작품. 섹스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기법이 탁월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탄(시인)>
이 달의 시 가운데서 얼른 눈에 띈 작품은 김윤성씨의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얼굴』(월간문학)의 2편이었다. 산문시로서 구어체 스타일로 돼있는 이 작품들은 김씨의 다른 작품이 그렇듯 그 시어가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그러나 거듭 읽을수록 재미가 있다. 그것은 일상어를 잘 배열함으로써 낱말과 낱말의 이어짐에서 오는 분위기, 또는 구조의 아름다움 때문인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에서 <지금 무릎 위에 놓인 주름잡힌 나의 손> 『나의 얼굴』에서 <사진에도 거울에도 또 남의 눈에도 비쳐지지 않고 있을때의 나의 얼굴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귀절에서는 인생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든든한 시인의 육성을 발견하게 된다.

<김선영(시인)>
김기석씨의 『그림자처럼』(현대시학)은 삶의 아름다운 그림자를 느끼게 한 청결한 시편이다.
군중 속에 혼자 돌아앉아 있는 고독한 자신을 스스로 불러내는 노래처럼 인간의 정한이 깃들여져 있다.
쉽고 평범한 글을 쓰면서도 이만큼 큰 호소력을 지니기도 어려울 것이다. 함께 발표한 『착한 것』은 확신을 가진 삶은 빛나는 것이고 일상의 고뇌도 이 빛으로 용해되며 그로써 삶은 더욱 뜻 있는 것이 됨을 보여준다.

<김시태(평론가)>
박건씨의 『겨울연서Ⅱ』(시문학)는 삶의 추구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는 어떤 인생론에 입각한 주제를 개념적으로 뚜렷하게 제시하여 독자를 설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겨울이라는 이미지의 현상화와 그 상징의 함축을 통하여 시를 미적 차원에서 훌륭하게 살리면서 그 안으로 깊숙하게 감춰둔 주제를 구성할 수 있는 길을 터놓고 있다.
그리하여 독자가 떠올리는 주제는 이 시로 하여금 인생이나 현실위에 정착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는 시 자체가 구제해야 한다는 과제를 이 작품은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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