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신 등에 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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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소주의 시객 고청구의 노래가 생각난다.
봄은 어디서 오나/봄이 오면 어디서 머무나/달은 지고, 꽃은 말이 없는데/작은 새들은 무슨 말을 주고받네.
『문매각』이라는 시다. 이제 한창 화기가 무르익을 남도의 훈풍을 생각하면 메마른 시정인의 마음에도 시심이 감돈다.
그런 봄빛이 아련한 들과 산을 달릴 청년들의 건각은 연상만 해도 생명의 율동을 보는 것 같아 즐겁기만 하다.
목포를 시발로 서울까지 1천3백리의 대장정. 향토의 명예를 걸머진 팔도강산의 선수들이 닷새를 두고 그 길을 달려올 것이다.
목포는 반도남단의 항구도시로 동서를 잇는 항로의 길목. 그러나 무슨 일인지 한때는 활기도 의욕도 잃은 양 침체를 면치 못했었다. 흡사 이방인들의 항구처럼 적막한 느낌마저 풍겨 주었다.
바로 그 도시에서 경호역전 마라톤의 시발을 알리는 팡파르가 울린 것은 인상적인 일이다. 깊은 잠을 깨우는 신호성이라고나 할까, 시민들은 마치 자신들이 줄달음이라도 치는 듯 환호와 활기에 넘쳐 있다.
요즘은 더구나 영산강 개발붐을 타고 이 지역 주민들은 새로운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있다. 하구언공사가 끝나면 이곳은 농경지로서의 활력을 찾고 또 관광지로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모두가 경사스러운 일들이다.
마라톤은 어느 운동보다도 인간의 의지를 시험하는 스포츠다. 오랜 시간을 두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묵묵히 혼자서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의 의지와 일상의 안이한 타성과의 투쟁이다. 또한 목표를 향한 의지의 도전이다.
마라톤의 유래를 보아도 그것은 희망과 용기를 상징하고 있다. 기원전 490년 페르샤 전쟁에서 아테네군은 그야말로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소수의 병력으로 페르샤 대군과 맞붙어 싸우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아테네군은 마라톤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감격의 전승을 알리는 어느 병사의 전령이 오늘의 마라톤 경기가 되었다.
그 때문에 마라톤은 그 장렬한 성취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승리에의 확신·집념, 그리고 부단한 노력―그 모든 의미가 이 경기에 함축되어 있다.
그대 고향에서 왔으니/응당 고향 일을 알겠구먼/오는 날 우리 집 창 앞에/매화가 피었던가.
신춘의 화신을 등에 지고 달려올 선수들에게 왕유의 이 시 한귀절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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