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선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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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난해 초봄 미국에서는 이변이 일어났었다. 마치 태풍이 지나간 뒤처럼 잠잠해진 밤9시. 술집도 경기장도 극장도 일찍 문을 닫았다. 아니 사람이 오지 않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
1억3천만명의 미국 시민은 그 순간 숨을 죽이고 TV화면을 지켜보았다. 전 미국TV수상기의 85%가 ABC-TV에 채널을 맞추었다. 그것은 아폴로11호의 달 착륙이후, 그리고 TV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M·미첼 원작)이후 처음 보는 하나의 이변이었다.
『뿌리』(루츠)를 보려는 사람들이었다. ABC-TV가 무려 6백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이 TV드라머는 미국인들에게는 하나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다. 어느 미국의 사회학자는 『멍청하게 살고있는 미국인들에게 천둥소리를 들려주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원작자 헤일리는 무려 l2년이나 걸려 어느 흑인의 7대 선조를 추적했었다. 아프리카의 현지를 답사하고, 수백명의 사람들과 인터뷰하고, 도서관의 먼지 쌓인 책들을 들춰보았다. 정말 소설을 발로 쓴 격이다. 르포르타지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집념과 의지로 개척한 것이다.
작가는 그 얘기가 바로 자신의 『뿌리』를 캐어본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이기 전에 자신의 인간다큐멘터리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뿌리」는 미국인의 어두운 역사에 밝은 조명을 비춰주는 하나의 고발문학이랄 수도 있다.
자만하는 미국인·위선적인 이웃, 엘리트 지상주의자들, 인간부재의 사회, 물질만능의 풍조, 백인 우월주의들… 『뿌리』는 바로 그 모든 것에 청천벽력 같은 경종을 울려주었다. 그것은 재미를 초월한 어떤 절규에의 공감 같은 것이다.
어디 미국뿐이겠는가. 인간이 살고있는 이 지구의 모든 곳에 도사리고 있는 어두운 지층에 눈부신 서치라이트를 비쳐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의 발등을 도끼로 찍는 일은 『뿌리』속에만 있는 기이한 사건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있었던 폭력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앨릭스·헤일리는 이 소설로 인해 무려 7백만 달러의 횡재를 했다는 후문도 있다. 세계의 10여개국에서 앞을 다투어 번역출판을 했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도 몇군데 출판사가 동시출판의 경합을 벌였다.
바로 그『뿌리』가 오늘부터 TBC-TV를 통해 방영된다. 백인과 흑인의 그 눈물겹고 처절한 역사가 주는 교훈은 우리 황인종의 마음에는 또 다른 감동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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