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해야할 공부가 너무 많아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지난해 11월 P 국민학교 4년 K양(U)이 가출을 했다. 비교적 여유있는 가정의 맏딸인 K양은 집을 나갈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법석을 떤 끝에 12일만에 돌아온 K양. 『만원「버스」에 시달리다 집에 오면「피아노·레슨」과외공부 등 너무 고달파요.』 3학년 때부터「버스」통학을 해왔다. 변두리로 이사한 후 부모들은 K양을 전학시키지 않았던 것.

<묵살되는 고달픔>
가출 소동을 빚은 후부터 K양의「피아노」와 과외는 없어졌다. 『엄마는 뭐든지 다 잘해야 한다며 학교가 끝나면 꼭「피아노」를 치고 오라고 해요. 접때는 학교에서 그냥 한 시간 가량 놀다가「피아노」를 치러가지 않았어요. 「피아노」만이라도 치러 다니지 않았으면 좀 편하겠어요. 저는 해야 할 공부가 너무 많아요.』
서울 Y국교 4학년 글짓기 시간에서 나온 내용이다.
담임선생 이모씨(40·여)는 이와 비슷하게「자유롭게 뛰놀고 싶은 시간이 모자란다」는 내용의 작문이 많아졌다는 것.
서울 종로구 A동 어느 사립 국민학교 4학년 김모양(11)의 지난 11월중 하루 일과표를 보자.
▲하오3시=하교 ▲3시30분∼4시30분「피아노」교습 ▲5시∼6시30분=과외공부 ▲7시∼8시 저녁식사 ▲8시∼9시30분 숙제 및「피아노」연습.
김양과 같은 학년의 L양(12)과 B양(11)은 미술 과외가 하나 더불어 더욱 빡빡하다.
『지금은 숙제가 훨씬 줄었어요. 제 경우만 해도 아주 가볍게 내지만 그래도 과중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애들이 하는 일이 너무 많아요.』 서대문구 E국교 L교사의 말.
김양은 학교가 파하는 대로「피아노」선생 집으로 다시 과외선생님이 오는 친구네 집에 들렀다가 어두컴컴해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와서도 학교숙제, 「피아노」연습, 과외선생이 내 준 숙제 등으로 1시간 이상 책과「피아노」와 씨름을 해야한다.
뒤에는 어머니가 감독하고 있어 한 눈을 팔지 못한다.

<태권에 웅변공부>
「아파트·타운」내의 국민학교 6학년 짜리인 S군(13)은 6학년 2학기가 시작되는 지난해 9월부터 같은「아파트」친구 4명과 함께「그룹」지도를 받고 있다. 한달 1만5천원 짜리의 이「그룹」은 중학 1학년 과정의 영어와 수학.
6학년 전과목에 대한 과외도 별도로 받고 있어 2중 과외를 하고 있는 셈이다.
국민학교 학생의 영어과외는 최근「아파트」단지나 신개발 주택지의 가정에서「붐」을 일으키고 있다. B「아파트」주변에는 4∼12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영어교습소(「라보」=Language Laboratory)가 20여 곳이다 몰려 성업중이다.
지난해 12월 초, 서울 C국민학교 2학년 어느 반의 국어시간.
선생님의 질문에 K군(9)은 느닷없이 괴성을 질러 대답하고 조용히 이야기 할 것을 큰소리로 떠들어대 한반 전체를 크게 웃긴 일이 있었다. 부모에게 알아 본 결과 K군은 2달 전부터 학교부근 웅변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것.
어느 사립 국민학교 교무주임 L교사(40)『요즈음은 공·사립을 막론하고 웬만한 집 애들은 모두 한가지 이상의 과외를 하고 있어요.』
「특기교육은 어릴 때부터」라는 말이 언제부터 유행어가 됐는지 많은 어린이들이 학교이외의 곳에서 많은「공부」를 하고있다.
「피아노」「바이얼린」·무용·태권도·미술 등 과외지도는 이미 옛말. 웅변·서예·전자계산기 작동법까지 과외의 한 과목으로 등장했다. 신흥 주택가인 서울 서대문구 G동·Y동 일대의 몇 개 국민학교 주변에는 웅변 학원만도 1백여 곳에 달한다는 것.
학교수업 외의 과외는 학년이 높아질수록 열기를 더해간다.
상당히 부유한 가정의 L군(18·K고교 2년)은 아예 자기 집에서 전공이 다른 S대·K대생 12명과 동숙하면서 6개월간 과외를 받은 적이 있다.「부족한 부분을 보충 받는」것이 아니라「전부를 다시 만들어내는」작업을 했다.
S고 교무주임 M교사(41). 『서울에서 과외를 받지 않고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은 가뭄에 콩 나듯 보기 힘들어요.』

<비정상「과외출신」>
실제로 서울대 대학 신문사가 지난해 3월 3천3백15명의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로는 42.5%인 1천3백75명이 월2∼3만원 짜리 과외를 받았고 월 70만원 짜리 과외를 받은 학생도 있었다.
「시험문제를 다루는 기술」만을 터득한다는「과외출신 대학생」은 대학 2학년만 돼도 교과과정을 절대로 따라가지 못한다는 심한 후유증을 겪게 마련이다.
서울출신의「과외학생」들이 비교적 많이 입학한다는 어느 유명 사립 대학에서는 지난가을 교수회의를 열고「과외로 길러진 학생들의 지도방법」에 관해 심각하게 논의 한 적이 있었다.
「과외학생」에게는 『적응 능력은 크지만 참조능력이 적다』는 것이 교수들의 진단이었다.
이 대학이 과외를 받지 않는 지방 학생들을 보다 많이 유치하기 위해 S대와 같았던 시험과목을 모 대학과 동일하게 조정한 것도 바로 1년 전의 일이었다. <이서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