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창작실] 부부 명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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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활짝 펴 봄낮이 더 환하다. 개나리.진달래, 그리고 연록색으로 피어오르는 버들가지 드리우고 봄 강은 흐른다. 꽃 그늘에 서면 환한데도, 강물 들여다보면 울긋불긋 예쁜데도 마음 속에 지는 그림자는 무엇인가. 왜 이리 환하게 슬퍼지는가.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드라.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때마침 봄을 맞아 명창 김일구(金一球.63).김영자(金榮子.52)씨 부부가 '사철가'를 부르며 목 푸는 소리가 전주 산천을 휘감고 있다. 봄날이 어찌 빨리 가든지 무정한 세월아 가지를 말아라, 아까운 청춘이 다 늙는다며 때론 하소연하듯,때론 꾸짖듯 내지르는 소리에 봄 그림자는 지는가.

3년전 김씨 부부는 40여년 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전주 풍남동 한옥마을로 왔다. 소리를 소리답게 들어주는 귀명창이 많은 판소리의 본고장 전주에서 소리에 전념하기 위해서다. 아울러 명창이 되려는 젊은 후학들을 가르치려 '온고을 소리청'을 열었다.

오는 6월 21일 서울 국립국악원에서 열리는 명창 5인전에 나란히 초청된 김씨 부부. 이어 7, 8월에는 미국과 영국 등에서 공연을 갖기 위해 연습에 몰두하다 춘정을 못이겨 야외로 나와 목을 트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프랑스에서 부부가 그 무대에서 죽어도 한이 없게 판소리를 불러 뜻도 모르는 파란 눈의 관객들을 울렸었다.

"어릴적 시작해 평생 매달리고 있는데도 3일만 안해도 소리가 제대로 안나옵니다. 허니 항시 하고 있는 것이 소리밖에 없지요. 종일 학생들과 함께하며 내는 것이 소리인데도 그것만으로는 안돼요. 가르치는 소리가 아니라 제소리를 끊임없이 쌓기 위해 하루 적어도 3시간씩은 부부가 함께 연습하고 있지요."

연습할 때 부부는 서로 고수가 돼준다.'암고수 숫명창'이라고 북이 숨통도 터주고 추임새도 넣어주며 껴안아줘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온다.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 오누이가 오랜만에 남남인 채 만나 밤새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듯 한을 풀어가는 그 소리와 북으로 매일 부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서로의 소리를 잘 알기에 제 소리가 조금만 아니어도 꼬치꼬치 따지고 가르치려 드는 통에 정만 나누는 게 아니라 싸움도 많다.

"일인 무대인 판소리 주인공으로서의 외모와 멋진 몸동작인 너름새가 좋아야 하고 관객이 알아들을 수 있게 뚜렷하게 사설(가사)을 전해야 합니다.또 이 대목에서 저 대목으로 넘어갈 때의 사설인 아니리도 즉흥적으로 잘 구성해 관객들의 이해와 흥을 북돋워줄 줄 알아야 되고요."

국립창극단 출신으로 같이 주연도 많이 해보았던 김씨 부부는 일인 종합 광대로서의 소리꾼 역할을 강조한다. 광대의 역할 위에 소리가 서야 비로소 관객의 마음을 지극히 울리고 웃길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잡소리, 잡생각까지 잠들어 고요한 한밤중부터 새벽까지 판소리 한바탕을 부릅니다. 오장육부에 쌓인, 한 많고 곡절 많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켜켜이 쌓여 삭혀질대로 삭혀진 것들을 온몸의 통성으로 풀어내는 소리여야 비로소 남들의 한과 흥도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거기에 이르는 소릿길이 굽이굽이 멀기도 머네요."

봄이 왔다고 먼 산 뻐꾸기 울고 이리 좋게 왔다 금방 저리 아쉽게 떠날 봄을, 인간사를 탓하고 어우르는 김씨 명창 부부의 소리 그늘에 온고을, 전주 봄날의 해도 설핏 기울며 귀 열고 있다.

전주=이경철 문화전문기자 <">bacchus@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 김일구·김영자 부부는 …

전남 화순에서 김동문 명창의 아들로 태어난 김일구씨는 8세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한다.

1960년 서편제의 대가 공대일 명창으로부터 '흥보가'를 전수 받아 청년명창으로 이름 날리던 김씨는 변성기에 접어들자 일단 소리를 접고 아쟁.가야금을 배운다. 다시 71년부터 박봉술 명창으로부터 '적벽가'를 배우며 소리에 몰두한 김씨는 83년 전주대사습대회 판소리부에서 대통령 상을 받고 91년 KBS 국악대상을 수상한다.

대구에서 태어난 김영자씨는 10세 때 소릿길에 입문, 전주 대사습대회 판소리 부문 장원, KBS 국악대상등 남편 못지않은 화려한 수상경력을 지녔다. 부부 모두 중요무형문화재 제 5호 각각'적벽가''수궁가'준보유자로 지정된 '준인간문화재'다.

연주자와 소리꾼으로 국립창극단 공연에서 만난 둘은 79년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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