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강민석의 시시각각

달구벌에 온 하로동선의 막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TK 황태자, LP(리틀 프린스)라 불리던 박철언. YS와의 갈등으로 자기 손으로 만든 민자당을 떠나 1997년부터는 DJ 편에 서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박철언 카드를 놔둘 리 없다. 98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두 달 전이었다. 청와대로 박철언을 불렀다. 당시 배석한 이가 박준규 국회의장이었다. 박 의장이 먼저 박철언에게 대구시장 출마 얘기를 꺼냈다. 깜짝 제안에 당황한 박철언이 고개를 젓자 DJ가 재차 나섰다. 거절하기 힘든 당근을 던졌다.

 “박 의원이 출마하면 승패에 관계없이 중용하겠습니다.”(『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박철언)

 선거에 지더라도 통일부 장관 같은 요직을 챙겨주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박철언은 결국 고사했다. 선거엔 자민련 이의익 후보가 나섰다. 20.6%를 얻었다.

 만약 그때 박철언이 출마에 응했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까. 일단 아니라는 데 한 표다. 한때의 TK 황태자라 해도 한나라당 간판이 아닌 이상 오십보백보였을 거다.

 그런 달구벌이지만 개인적으론 이번엔 가장 주목한다. 이번 지방선거의 최대 하이라이트가 될 수도 있다. 야당 후보는 김부겸 이다. 그는 ‘하로동선(夏爐冬扇)’의 막내 정치인이다. 제정구·박석무 ·노무현·유인태·원혜영·박계동 등이 97년 낸 고깃집 이름이 ‘하로동선’이다. 직접 깨끗한 돈으로 정치하겠다며 낸 가게다.

 여름 난로, 겨울 부채. 원래 후한(後漢)의 학자 왕충(王充)이 『논형(論衡)』에 쓴 말이다. 아무 짝에 쓸모없는 물건을 뜻한다.

 여름에 난로를 팔고, 겨울에 부채를 파는 정치는 결국 ‘바보정치’다. 양지를 버리고 사지로 뛰어드는 정치 말이다. 3선을 한 경기도 군포를 떠나 대구로 온 김부겸. 바보정치 계보의 막내 주자다.

  대구에서 야당의 득표율은 정가가 15% 정도다. 열린우리당 이강철 후보의 35%(17대 총선), 무소속 유시민 후보의 32%(18대 총선). 역대로 가장 선전한 수치다. 김부겸은 지난 총선 때 그걸 뛰어넘는 40.4%를 득표했다. 대구의 강남이라는 수성구에서다. 결과가 뻔할 것 같아 여론조사까지 안 하고 있는 대구를 주목해보는 까닭이다. 김부겸은 ‘박근혜 대통령-야당 시장 김부겸’의 조합을 역설하고 있다. 여야가 같이 대구의 문제를 해결하는 모델이다. 박정희 대통령 컨벤션센터 건립도 약속했다. 역사와의 화해 메시지다.

 이번에 만약 김부겸이 대구에서 이기면…. 이변이 아니라 정계의 대지진이다. 여당으로선 상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겠다. 대구의 지인들에게 여론을 물어봤다.

 -분위기는?(기자)

 “옛날 대구는 아이지.”(A)

 “새누리당, 요새 마 인기 읍다.”(B)

 - 그래서. 이번엔 새누리당이 어렵다?

 “마, 그건 아이고.”(A)

 “…김부겸이 근소하게 질끼다.”(B)

 -근소하다는 뜻은?

 “김부겸이 인기는 좋아. 좋으면 뭐하노. 민주당 아이가.”(A)

 “사람은 괜찮아. 당이 영….”(B)

 둘 모두 스스로를 ‘보수꼴통’이라 말한다. 그런데 김부겸에게 거부감은 없다. 오히려 ‘선전’을 점친다. 하지만 선전은 패배를 조금 좋게 말하는 것이다. 당에 대한 거부감이 여전하다면 여전히 안 팔리는 ‘여름 난로’다.

 그렇다고 “김부겸이 당선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말하는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만 해도 놀라운 변화다. 야당 후보가 대구에서 당선될 수 있느냐를 따지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새누리당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새누리당은 지금 지역감정이 온전하기만을 바라야 할 상황이다. 정당이 지역주의 깨야 한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언제까지 명분의 반대쪽에 서 있을 건가.

 1907년. 대한제국이 진 빚 1300만원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은 서상돈 선생이 결성한 대구의 ‘단연(斷煙)회’가 모태다. 금연운동에서 출발한 운동이 들불처럼 번진 것처럼 ‘단연(斷緣)운동’이라도 벌어지면 어찌할 텐가. 대구는 ‘금단현상’을 견뎌낸 경험이 있다.

정치부 부장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