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4)문학지를 통해 본 문단비사 20년대「조선문단」전후|춘원의 조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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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크고 작은 향나무를 재주껏 다듬고 손봐서 세울자리 찾아 맵시있게 꾸며 놓온 정원에는 9월말깨인데도 군데군데 각색의 장미꽃이 계절인양 아름답게 피어있었다. 수욱 물러 있는 장록수며 각종의 정원수가 대저택의 후원같이 유수하고 아늑한 그늘을 지어주는 그런 뜰을 안고 아담하고 품위있는 건물이 자리잡고있어 별장이나처럼 보였다.
오후 한시의 햇볕이 따사롭게비치는 화단 한쪽에서 춘원선생이 나를 보자 손을 들었다. 역시 늠름하고 당당한 체격이지만 얼굴은 약간 수척해진듯 했다.『잘 찾아 왔군요』
그는 웃지도 않고 그 노란 안광으로 찬찬히 나를 감싸며 말했으나 나는 『그럼 이까짓데를 못찾아요?』하는 대답을 입밖에 내지 않고 속으로만 종알댔다. 그는 나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이 초만원이니까 조금만 지나면 조용해져요.』
점잖게 보이는 외래객들과 교수로 보이는 신사들로 식탁은 거의 차있어 훈훈한 내음으로 숨이 막힐듯한데 뒤쪽 창옆에 빈자리를 찾아가며 변명 비슷이 그가 한말이었다. 그는 여기를 자주 오는지 그런 형편까지 알고있었다.
하얀 할팽복 (할팽복) 에 흰 위생모를 쓴 요리사돌이 정갈해보였고 음식을 날라오고 주문을 받아가는 소녀들도 하늘색 제복에 같은색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손님들의 대부분이 일본인인것에 다시금 놀랐다.
아니나다를까 우리가 부탁해온 음식을 먹는 동안에 좌석의 틈이 나기 시작하더니 1시간 남짓해서는 그 붐비던 자리가 조용해지고 차를 들기 위하여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만이 듬성듬성 보였다.
나는 그가 양식으로 점심 대접을 한 그의 저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식사중의 그의 태도와(나의 「매너」에 신경을 쓰고 있는) 쉴새 없이 나의 거동을 살피는 눈치로써 내가 얼마큼이나 양식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려는 그의 심산임을 알아챘고, 그의 그런 의사는 오로지 나를 권장하려는 뜻으로 조금이나마 내게 도움을 주고자 함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후식으로 나오는 차를 들면서 그는 찬찬히 요령있게 당시 문단의 상황과 문인들의 동태등을 설명해 준후애 말소리에 특별한 힘을 넣어 이런 말을 하였다. 『작가는 큰 북이 되어야 합니다. 큰 북은 크게 울리는 큰소리도 낼수 있고 작게 울리는작은 소리도 자유자재로 낼수 있지만 작은 북이 큰 소리를 내려면 찢어지고 말거든요.』
『작가라면 큰 북이 되겠다는 희망은 저마다 다 가지고 있을게 아니겠어요?』
『그렇지도 않아요. 「스케일」이 크그 인생을 투시하는 눈이 날카롭고 작가 스스로의 인격적인 깊이가 있고 무한히 솟아나는 능력이 있어야 큰 북이 될수 있을 겁니다.』
그는 예를들어 모씨와 모씨같은 분들은 작은 북이라고 할수있다는 해설까지 덧붙이고 나서 내게 정성어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오3시쯤 되니까 실내는 더욱 한적하여서 그는 적망한 장소로 옮겨 여러가지의 얘기를 들려주었는대 그만큼 오랜시간을 차지하고 앉아서 담화하는데도 누구하나 눈여겨보는 직원들도 없고 이상스러운 눈초리를 던지는 손님도 없어 참으로 맘 편하게 휴식할 곳이라는 생각을 굳혔으나 지금은 그 대학식당이 어디쯤에 있었던지 눈어림조차 할 수없이 온통 딴 지역이 되어서 인생의 무상을 한탄할수밖에 없었다.
그는 헤어지면서 내개 아무날 몇시에 청목당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였다.
청목당은 진고개(지금의 충무로)명물인 당시에 제일가는 제과점인데 나는 처음으로 그 집에 가보았고, 그집의 특제인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다른 곳의 것과는 아주 색다른 별미였던것이다.
춘원 선생은 거기에서 나를 조선「호텔」로 바로 데리고 갔다. 조선「호텔」아래층 「로비」에 화려한 천막을 치고 「코피숍」으로 이용하고 있는 곳인뎨 실내의 꽃장식도 고우려니와 「코피」맛도 일품이었다.
그는 시골출신의 작가인 내게 골골이 찾아먹이면서 내 견문과 안계를 넓혀주려고 노력하는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하루는 모윤숙과 셋이 덕수궁에서 만나기로 하여서 하오3시에 그곳으로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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