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8)제57화 바둑에 살다(57)|<제자 조남철>조남철|기계분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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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74년부터 76년 연말까지 이른바 기계파동이 있었는데, 초창기에도 운영진과 기사간의 반목·대립은 있었다. 즉 한국기원이 사단법인체로서 법원등기가 끝난 것은 54년4월3일이었고, 이때부터 승단대회와 입단대회를 세 번씩이나 치렀고 다음에 있었던 제4회 승단대회는 56년12월17일에 있었다.
이때 지방기사와 재경기사가 대국장에 모였는데, 기원 측의 제시조건에 불만을 품고 대회를 기권해버린 일이 있었다. 기사 측의 제시조건은 승단 규정을 현행법보다 50% 강화하여 어렵게 만든 점과, 하루에 몇 판이고 둘 수 있었던 것을 한판만 둔다는 것으로 못박은 점이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 하루에 한판이면 당연했지만, 지방기사들에게 있어서는 여러 날이 걸리게 되고 그것은 여비가 문제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방기사들은 기원 측에서 여비를 부담해준다면 하는 조건이었으나, 기원 측에서는 그 재원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특수한 사정이 있었던 두 기사만 빠지고 나머지 기사들은 필자가 경영하던 송원기원으로 몰려와 그 곳을 연락처로 삼기에 이르렀다. 나는 당시 기사이자 동시에 기원 측의 이사였으므로 입장이 매우 난처했다.
그러나 기사냐, 이사냐를 양자택일할 형편이어서 전자를 택하여 이사직을 사퇴하고 기사들과 동고동락하기로 맹세했다.
기원 측은 전봉덕 부이사장과 최상두 총무가 이사장을 대리해서 절충·화해를 꾀했으나 역반응으로 기사들은 승단 규정 원안복귀를 고집하여 더욱 단결하게 되었다.
그래서 상경한 지방기사 자신들은 대한 기사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그 출발을 기념해서 무슨 대회를 열자고 했다. 이래서 기사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것이 오늘에까지 계승되고 있는 셈이다. 대한기사회는 몇몇 신문사와 새로운 개최의 대국을 위해 절충했으나 이 일은 처음부터 난관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세도가 당당했던 장경근씨가 한국기원 이사장이었으니 신문사들이 새로운 기전에 손대기를 꺼리는 판이었다. 그런데 유독 세계일보기자였던 최승표씨(1급)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설국환 편집국장(현「그레이하운드」사장)이 이에 호응하는 영단을 내려주었다.
이리하여 57년1월 세계일보사의 후원으로 기사회는 제1회「국수 순위전」을 실현시키게되었다.
이에 힘을 얻은 노국수들은 의기양양한 나머지 한국기원의 독선적인 처사를 비난하면서 보다 진취적인 기원을 만들자고 나왔다. 세상에는 짧은 안목도 있는 것이어서 바둑계의 이런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자는 사람도 나서게 되었다. 그것을 약술해 본다.
하루는 배상연옹이 나를 좀 보자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구석진 곳으로 가더니 배옹은 어떤 유지가 이 기회에 한국기원보다 훌륭한 기원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인데, 내 의견이 어떤지를 묻는 것이었다. 나는 그 유지가 누구인지 궁금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배옹은 서슴지 않고 민주당의 중진인 모씨라고 이름을 대어주었다.
이때 순간적으로 느낀 것은 한국기원 이사장이 자유당의 중진이니까 바둑계도 대립적으로「민주당 기원」(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을 만들자는 것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기도보국에 몸을 바칠 각오를 한 나는 바둑이 가진 신성함에 비추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가 없다는 지론이 서 있었고 또한 비록 분규가 있기는 했지만 우리 실정에 두 개의 기원이 병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사적으로 말해 해방과 6·25동란의 어려움을 겪고 심혈을 기울여 키워온 한국기원인데, 그것의 붕괴는 곧 자신의 멸망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초점은 한국기원 자체에 있지 않고, 이사들의 시의에 어긋나는 과격한 처사에 있고 보니 이사진만 개편한다면 일은 잘 풀려 나갈 걸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옹에게『그분이 우리를 도와주겠다는 뜻은 고마우나 기원은 새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기사회의 기금을 도와주면 좋지요』하였다. 이 말의 뜻을 배옹은 알아차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하면서 배옹이 물러가던 일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어쨌든 세계일보사에 의해「국수 순위전」이 진행되자 한국기원 측에서도 부득이 기사들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기사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한국기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곁들여 말하자면「국수 순위전」도 그후 한국기원에서 주관하여 2회를 치렀는데, 세계일보가 폐간되는 바람에 그도 또한 없어져 단명기전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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