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순교자상 작가 찾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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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평생을 이름 없이 성상(聖像) 작업에 몸바친 장인 정신이 50여 년만에 부활했다.

본지가 3월 11일자 26면에 보도했던 '국내 최초의 순교자상 발견'에서 한국 순교자 성상을 최초로 빚은 조각가는 강홍도(1922~95.사진)인 것으로 밝혀졌다.

기사를 보고 지난 주 서울 성북동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를 찾은 고인의 아들 강성원( 47)씨는 "12개의 순교자 성상을 보는 순간,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보아 너무도 눈에 익은 친숙한 형상이었고 성상 밑에 새겨진 글씨를 대했을 때 선친의 필체임을 당장 확신했다"고 말했다.

서양화가인 강씨는 "전국의 성당과 수도원에 어림잡아 1천여 점이 넘는 성상을 만들어 세운 업적에 비해 무관심과 몰이해 속에 쓸쓸하게 살다 간 무명 작가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 듯 감개무량했다"며 목이 메었다.

강씨는 성북동 순교자 성상이 강홍도 작임을 입증할 증거로 1980년대에 제작된 30여 점의 유품 성상, 1백여 점의 작품 사진 자료, 성상에 새겨진 글씨와 고인의 필체를 꼽았다. 필요하다면 작품의 엑스선 분석이나 전문가의 감정도 받겠다고 했다.

순교자상을 처음 발견한 조각가 최종태(71.서울대 명예교수)씨는 강씨가 제시한 증거와 증언을 들은 뒤 "강홍도 선배의 작품이 1백% 확실하다"고 말했다. 작가 서명을 남기지 않은 채 성인들 이름만 적은 것도 앞에 나서기를 싫어했던 고인의 성품을 증언하는 대목이라는 것이 최씨의 설명이다.

작가와 친분이 있던 원로 조각가 김영중씨도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형상과 생략된 옷주름, 섬세하고 뚜렷한 이목구비,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얼굴선, 시멘트와 석고 재료를 즐겨 쓰는 점 등이 강홍도의 작품 세계와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강홍도는 서울대 조각과 2회 졸업생으로 학창 시절부터 성상 작업에 집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순수 예술에 대한 꿈을 일찌감치 접고 성상에 대한 사명의식으로 일생을 봉사한 그는 외국 신부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벨기에.브라질 등에서 성상 주문을 받기도 했다. 고인은 침묵과 고행 속에 한 점 한 점 완성한 성상을 복음으로 남겨놓고 갔다.

미술평론가 최태만씨는 "강홍도는 한국 근대미술사의 조각 부문에 새로운 장르의 개척자로 재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 작가"라며 연구자들의 동참을 바랐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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