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윤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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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을 비롯한 우리나라 대도시의 길거리는 이제 안전지대로 설정해놓은 횡단보도마저 마음놓고 건너 다닐 수 없을 만큼 윤화의 상습지대가 된지 오래다.
제한속도·우선 멈춤·주행선 지키기 등 수칙이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마구 달려드는 차량의 물결,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뚫고 뛰어 건너야 하는 종종걸음의 시민들, 이런 폭주와 혼잡 속에서 횡단보도는 보행인들에게 조금도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 교통의 사각지대가 되고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지난 28일 서울반포「아파트」단지 앞 횡단보도를 건너던 3모자가 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던 시내「버스」에 치여 숨진 사고는 듣는 이의 가슴을 더 없이 애처롭게 해주고 있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다시 한번 건널목 교통사고의 방지와 도시대중교통의 안전 책을 위한 사회의 깊은 관심과 반성을 촉구해야할 것 같다.
건널목사고뿐만 아니라 모든 교통사고의 1차적 책임은 운전사에게 있다. 실제로 올 들어 7월말까지 전국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총4만7백48건 가운데 운전과실로 빚어진 것이 3만8천3백88건으로 94·2%에 이르고 있다. 이는 요컨대 운전사들이 안전수칙과 주의의무를 다 하지 않음으로써 시민들을 부단한 공포 속에 떨게 하고 있음을 숫자적으로 잘 증명해 준 셈이다.
그러나 운전사의 책임을 묻는 것만으로 교통사고가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이제까지 법규위반운전사에 대한 처벌을 2중·3중으로 강화하여 운전사의 과실을 엄하게 다스려 왔지만, 오히려 교통사고는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책은 「운전과실」을 낳고 있는 원인의 심층을 좀더 철저히 분석하여 다각적인 대책을 세우는데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직업운전사들의 가혹한 취업조건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시내「버스」의 경우, 요금인상에 따라 운전사의 임금은 현재의 하루 7천8백원에서 11월부터는 하루 1만원으로 다소 나아진다.
그렇지만 하루 근무시간은 여전히 평균18시간으로 실제 운전시간만도 16시간이 넘는다.
여기다 최근에는 운전사들의 해외취업 「붐」에 따른 인원부족으로 운수회사마다 격일근무제가 지켜지지 않고2∼3일 계속 근무를 강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시내「버스」운전사들은 거의 모두가 생리적 한계를 넘는 근무체제로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를 느끼면서 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복잡한 도시교통에서 야기되는 각종 자극과 사고의 위험을 기민하게 인지·판단하고 적절히 대응하기란 사실상 어려울 수밖에 없다.
특히 노선「버스」 운전사들에게는 「배차시간」이란 또 하나의 속박이 있다.
예컨대 서울시내 성산동∼우이동 간을 운행하는 (33)번 시내「버스」의 경우, 시발점에서 종점에 이르는 23km의 구간을 1시간11분에 주행, 하루6회 왕복을 하도록 돼있다. 이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정류장 정차시간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시속19km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서울도심의 차량 평균 주행속도는 시간당 14km에 불과하다.
극심한 교통체증현상이 소통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여기다 정류장 정차시간까지 합쳐야하기 때문에 실제 주행속도는 훨씬 더 늦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조금만 머뭇거리다 보면3∼4분 간격으로 쫓아오는 뒤차에 추월 당하기가 일쑤다. 이래서 시내「버스」운전사는 하루종일 쫓기고 초조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횡단보도에서의 우선 멈춤과, 심지어 정지신호까지도 무시하는 이른바 「공포의 질주」가 빚어지고, 이는 또 인명을 앗는 사고와 직결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1일 도급제 임금방식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택시」에 있어서는 더욱 심하다.
이렇게 볼 때, 교통사고의 방지대책은 도로환경정비, 운수업체의 대형화, 운전사의 취업조건개선, 그리고 사회전반의 준법정신앙양 등 종합적인 차원에서 모색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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