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교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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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X선을 발견한「렌트겐」은 사소한 잘못으로 고등학교를 퇴학당했다. 이 때문에 그는 화란의 대학에는 진학하지 못하고 「스위스」의 공대에서 배웠다.
그러나 그는 독일에 돌아온 다음에 강사자리도 얻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증이 없기 때문이었다.
「에디슨」의 퇴학경력은 더 빠르다. 그는 2더하기 2는 4가 된다는 선생의 말을 도통 납득할 수가 없었다.
「에디슨」은 결국 저능아로 딱지 찍혀 초등학교 1학년1학기도 끝나기 전에 퇴학당했다.
「에디슨」이 우리 나라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고등학교까지 무난히 졸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성적이 나쁘다고 해서 퇴학당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바닥 첫째였던 「에디슨」이 중·고교를 제대로 다녔다면? 그랬다면 그는 위대한 발명가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학교란 예나 지금이나 천재를 위하여 있지는 않다. 「제임즈·밀」은 자기아들을 학교에 보내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여기고 집안에서 교육시켰다.
그 결과「존·스튜어트·일」이라는 천재가 나왔다. 한동안 우리 나라 각급 학교에서 제일 자주 쓴 것은 「몇째』라는 말이었다. 성적이 자기 반, 자기 학년에서 몇째라는 뜻이다.
이게 민주교육에 어긋난다하여 고교진학이 추첨제로 바뀌면서부터 못쓰게 되었다.
최근에 고교입시 제를 부활하자는 소리가 높아져 가고 있다. 결국『몇째』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 교육적 효과가 더 크다고 본 모양이다.
당초에 평준화를 얘기할 때부터 질적 수준의 저하를 예상할 수 있어야 했다. 고교를 다시 입시제로 한다면 언제 또 체력이 약한 중학생들에게는 입시준비가 너무 부담이 간다는 인도주의론(?)이 나올지도 모른다.
이러나 저러나 제물은 언제나 학생들뿐이다. 시험제로 환원시킨다고 영재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장담도 없는 것이다.
몇 해 전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각국의 교육을 조사한 끝에 『일본의 초·중등교육이 기술적으로 우수하다』는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기술적」이란 것은 지식을 주입시키는 방법이란 뜻이다.
따라서 스스로 공부하는 힘,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키워 가는 힘, 인간으로서의 폭 같은 것을 제쳐놓은 얘기다. 교육의 참다운 목적은 사실은 이런데 있어야한다. 그러나 우리네 교육은 자꾸만 『몇째』만을 강조하게되는 것만 같다.
서울대학교가 새해 입시기준을 4과목으로 한정시킨다는 것부터가 「기술적」으로 잘 배운 학생들만을 뽑겠다는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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