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독립군 야사 신일양<제55화>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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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여기서 잠깐 만주지역의 독립군현황이 어떠했는지 그 계통을 살펴본다.
1920년 만주지역 독립군의 주력부대들은 그해 11월 북만만의 밀산에 집결, 독립군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l921년1∼3월간 독립군주력부대는 일군의 세력을 피하여 노령으로 넘어가 무력양성과 재기진출을 계획했다.
그러나 노령의 많은 독립군부대가 흑하사섭·노군의 방해로 수난을 겪다가 1922년 말부터 다시 만주로 넘어오게 됐다는 것은 전술한바와 같다.
이와는 달리 그대로 만주에 남아있던 독립군 부대들은 여전히 재만일군과 조국 진입작전등으로 항일투쟁을 계속해왔었다. 그러면서도 각 무장단체의 협력과 통합을 추진해왔으니 여기서 탄생된 단체가 통의부였다.
1922년8월 서로군정서(백광운외8명)·대한독립단(이영직외22명)·한교회(이형갑외4명)·대한광복단(이영선외l명)·대한정의군(박정석)·대한광복군(백남전외4명)·평북독판부(신언갑외10명)등 8개단체대표 71명이 참석한 가운데 통합회의를 가져 남만주의 통일된 기구를 마련한 것이었다.
통의부는 군사행동외에 호적정리·학교증설·부업권장·독립운동으로 희생된 유가족돕기운동등 일반적인 업무도 함께 했다. 그러나 1923년12월에 있었던 개편에선 기구를 좀 더 군사방면에 주력하도록 했다.
통의부 소속 5개중대 독립군은 대단히 큰 활동을 보인 중요한 부대였다.
제1중대=서로군정서계통이었다. 주 활동지역은 접안 통화현등지였다.
신전무관학교 졸업생으로 농장을 경영하던 신용관·채찬 등이 3·1운동이후 서로군정서에 소속해 군인을 모집하여 부대를 조직했다.
내외지에서 용감하게 활약, 일본에 큰 피해를 준 이름난 부대였다. 전성기 군인의 수는 9백여명에 달했었다.
제2중대=남만 대한독립단의 중요인물이었던 이웅해·최석순 등이 독립단의 급진파청년들을 규합하여 편성한 부대였다.
주 활동지역은 환인현 이창주등이었으며 군인의 수는 7백여명이었다.
제3중대=3·1운동직후 의주의 최시전·최천주, 삭주의 최지개·박응백 등이 천마산을 근거로 청년을 모집, 무장집단을 조직했다.
그러다가 남만으로 옮겨 본격적인 독립군으로서의 활동을 벌였다. 군인의 수는 6백여명이었으며 주활동지역은 환인현 북포자등이었다.
제4중대=3·1운동뒤 삭주인이며 천도구인이었던 홍석호 부자가 국내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남만으로 옮겨 제1중대와 연합하면서 국내의 청년을 모집하였다.
주 활동지역은 집안현 노야령등이었으며 군인수는 5백여명이었다.
제5중대=의병장 조맹선·이당용을 따라서 남만으로 옮긴 김오봉 등이 동지를 규합, 전경현 왕빈문등지에 근거를 두고 활동을 했다. 군인수는 5백여명.
이 5개부대는 만주의 유력한 군인집단으로서 각지에서 발생하여 서로 연결이 없었다가 통의부가 결성되자 그 산하부대로 집결됐던 것이다.
1922년8월 통의부가 조직된 뒤 3년동안 만주지역엔 많은 곡절이 있었지만 통의부 소속의 각독립군들은 본래의 목적인 항일무장활동을 끈기있게 전개하였다.
만주에서 일본영사관·군부대·경찰 등을 습격하였지만 자주 국내로도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일군·경동을 괴롭혔다.
일군의 간도침입으로 한때 독립군은 군사력에 큰 타격으 입기도 하였지만 젊은 병사들의 의기는 여전히 대단해 일본에 대한 군사활동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맹렬했다.
우리 독립군의 활동이 이렇게 활발하게 되자 일본 육군성은 독립군의 방비책으로 만주와 국경지대에 1개사단 증설안을 세우고 l925년도 예산으로 2천여만원을 정부에 요청했으며 평북 위원·벽장 등 압록강 연안지대에는 곳곳에 포대를 구축하고 지하h를 봉하여 가까운 주재소등에 연락으 취하게 하는등 방비태세를 갖추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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