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호선, 신호 고장 난 채 나흘 달렸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3일 오후 3시 서울시청 2층 기자실. 서울시와 서울메트로 간부들이 전날 249명의 부상자를 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 열차 추돌 사고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사고 원인은 신호기 고장으로 잠정 결론 났습니다. 사고 당시 상왕십리역 승강장 진입 전에 설치된 신호기 2개가 신호를 잘못 표시하는 바람에 열차 자동정지장치(ATS)가 작동되지 않아 뒤의 열차가 앞차를 추돌하게 됐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충격 속에 더해진 국민들의 불안감을 의식했던 걸까. 서울시 관계자들은 연신 마른 침을 삼키며 신호기 고장 이유를 덧붙였다.

“지난달 29일 기관사들의 요구로 을지로입구역에 있는 선로전환기 속도 조건을 바꾸기 위해 연동장치의 데이터를 수정하면서 신호에 오류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당시 작업 과정에서 신호체계와 관련된 데이터도 함께 바뀌면서 오류가 발생해 신호기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해당 구간을 통과하는 하루 550대의 열차가 나흘 동안 똑같은 사고 위험에 노출된 채 운행됐다는 얘기다.

세월호 참사 18일째 실상을 드러낸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부실한 안전관리 시스템이다. 서울시는 세월호가 침몰한 다음날인 지난달 17일부터 30일까지 지하철도 특별점검을 했다. 특히 신호기는 일상적인 점검 대상이었다. 그러나 매일같이 이뤄진 점검에서도 신호기 오류는 발견되지 않았고, 4일 동안이나 고장 난 상태로 방치됐다 이번에 사고가 난 것이다.

“부실 사고가 만성화된 불안 공화국”이라는 탄식이 곳곳에서 나왔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일상의 위험’과 맞닥뜨려야 하는 국민은 정부와 시스템을 믿지 못하고 혼자 힘으로 위험을 감당해야 할 입장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조사 결과 사고를 처음 신고한 사람은 시민이었고, 공식적인 승객 대피 안내방송은 사고 7분 뒤부터 이뤄졌다”고 말했다. 세월호 사건 이후에도 당국의 안전관리 시스템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당시 사고 차량에 타고 있었던 승객들은 이렇게 증언한다.

“추돌을 당한 지하철 차량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사고와 함께 정전이 되자 직접 차량 문을 열고 선로를 걸어나와 안전지대로 대피했다. 사고 이후 ‘나가지 말고 대기하고 있어라’라는 안내방송이 있었지만 이미 승객들은 빠져나가고 있었다.”

승객들은 “침착해야 한다”며 서로를 다독였고, 정전 속에서도 출입문 수동 개폐장치를 찾아 문을 연 뒤 어린이와 노인, 여성 순으로 내보냈다.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승객 가운데 많은 이가 병원도 스스로 찾아갔다. 당시 상황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던 승객 강광수씨는 “사고 이후 안내방송이 늦게 나오고 명확한 설명도 없어 ‘피해자 입장에서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영상이 나중에 (비슷한 사고에) 대처할 때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인터넷 공간에선 “갑작스러운 위험에 빠질 경우 정부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기대할 수 없으며, 정부는 오히려 소송 과정에서 싸워야 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투쟁 대상”이라는 주장이 급속히 공감을 얻고 있다. “세월호 침몰과 지하철 추돌 사고는 경제발전 과정에서 안전을 희생시켰다는 반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AFP)는 지적처럼 국민들은 정부가 이번 기회에 ‘안전 인프라’를 획기적으로 강화해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진 않다. 정부가 도처에서 오랜 기간 누적돼온 위험요소들을 단번에 뿌리 뽑기를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국가개조나 적폐척결 역시 아직은 큰 구호 수준이다. 정부도 현실의 벽을 인정한다. 익명을 원한 한 당국자는 “안전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 맞춰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며 “안전사고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는 만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대책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는 동안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일상생활 속의 안전수칙을 숙지하고 지키는 것 외엔 달리 없는 상황이다.

지하철 추돌 사고와 관련해 수사대책본부를 구성한 경찰은 3일 서울 서초구 서울메트로 본사와 사고 현장인 상왕십리역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경찰은 사고와 관련된 운행일지, 무선교신 내용, 사고 차량의 안전점검 일지 등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상왕십리역 승강장과 차량 등에 장착된 폐쇄회로TV와 차량운행기록 장치 등도 압수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또 중상을 입은 사고 차량의 기관사 등을 상대로 사고 경위를 조사했다.

박재현·최민우 기자 abnex@joongang.co.kr

오피니언리더의 일요신문 중앙SUNDAY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아이패드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폰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 탭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앱스토어 바로가기중앙Sunday Digital Edition 구글마켓 바로가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