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살의 연속…적화 캄보디아-미 「리더즈·다이제스트」지 보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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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다음은 「리더즈·다이제스트」의 편집부장 「존·베런」과 「앤더니·폴」이 「캄보디아」적화이후 외부로 도망 나온 피난민들의 진술을 토대로 최근 집필한 『선량한 땅에서의 학살』이라는 제목의 글을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주>
1975년 4월17일 「캄보디아」에 평화가 왔다. 5년간의 내란 끝에 「론·놀」정부가 무너지고 무능과 부패의 정치는 끝났다.
60만명의 동족을 죽인 전란은 종식되고 황폐한 땅에 새로운 희망은 충만했다.
평화를 몰고 온 공산 「크메르·투지」는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으며 존경과 기대도 받았다.
그러나 곧 약탈과 학살이 시작됐다. 그들은 「앙카로에우」(상부명령)를 되풀이하면서 자동차와 자전거는 징발했으며 공무원과 군인의 학살을 자행했다. 수도 「프놈펜」의 시민들은 남녀노소 건강에 관계없이 이 도시를 떠나도록 강요되었다.
사람들은 쌀·통조림·항아리·옷·담요 등 닥치는 대로 주워담아 실은 자동차·자전거·수레를 밀고 도시를 떠났다. 차가 없는 사람들은 겁에 질린 아이들과 너무 늙거나 병들어 걸을 수 없는 인간짐짝과 짐 보따리를 운반했다. 더위는 무서웠고 길거리엔 낙오자가 죽어갔다. 이동행렬에 지체된 노인과 무녀·어린이는 용서 없이 살해되었다.
도시의 「부패」를 제거하고 「사람들을 순수하게 만드는 작업」으로서 살육은 정당화되었다. 창녀들이 칼로 찔리고 총에 맞아 죽었고 「지성인」이란 이유로 교사들을 죽였다. 「프놈펜」을 떠난 행렬은 더위와 갈증·굶주림으로 해서 차례차례 목숨을 잃었다. 한달 반이 지난 6월 초순에 이르러 첫 「엑서더스」는 끝났다. 도시의 3백50만명과 농촌지역 50만명 인구가 전국각지에 흩어져 갔다.
「프놈펜」에서 뻗어나간 도로들은 황량하고 조용했다. 시체들은 해골만 남았고, 병원의 침대와 자동차들은 녹이 슬었다. 최소한 30만명이 이 동안에 죽어갔다.
그러나 더 험악한 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착지에서의 작업은 상오6시부터 하오5시까지 휴일도 없이 계속됐고 곳에 따라선 밤에도 3시간씩 일을 했다.
휴식시간외에는 휴식과 대화가 금지되었다. 저녁이면 모든 부락사람들이 강제로 사상강좌에 참석 「건설」(코상)이란 명목의 비판의식을 가졌다. 두 차례 「코상」을 받으면 그는 끝장이었다.
「앙카로에우」의 조치결과 전쟁이 끝나고 76년 말까지 사이에 최소한 1백20만명이 이렇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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