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6)제53화 사상 검사-선우종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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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폭동의 음모의 의의>
남노당 서울지도부의「8월 해방계획」이라는 무력혁명은 첫째『8월20일까지 대한민국 공권을 인수할 것』, 둘째『9월1일에는 박헌영이 선거 위원장으로 평양에서 서울로 온다』, 셋째『9월 20일에는 총 선거를 실시할 것』. 네째 『9월21일에는 서울에「조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서울 지도부의 박헌영과 이주하는 이 계획을 한달 연기하여 그대로 강력하게 밀고 나가자는 속셈이었다 한다.
서울시 당 지도부의「특위책」홍민표는 다른 간부와 모든 당원들에게 당내 모든 기밀을 구수 밀회하며 만일의 경우 수사당국에 자신들이 피검 될 경우 죽음으로써 당을 수호할 것을 강력히 명령하였다. 그리고 당 간부들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전 조직을 도시 유화대로 완전히 편성 완료하고 정권인수를 위한 행정적인 절차 등을 위하여 시정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라고 서울 시정문제 연구 위원회에 지시하는 한편 서울지구 유경 사령관 조병수에게 전투준비를 하달하였다.
이렇게 해서 놈들은 9월20일을 향하여 천인공노할「무력 혁명」을 준비해 나가다가 국운이말까, 천행이랄까「특위귀」인 홍민표가 드디어 9월16일 정오께 우리 국립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 노동당의 대한민국 정부 전복 야욕-아니 남한을 강점 적화하려는「무력혁명」은 드디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9월 폭동 계획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북한 괴뢰가 때를 같이하여 남침을 감행하려던 끔직한 음모였던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우리 주변에서는 이 9월 폭동 음모사건의 전술적 의의를 올바르게 분석하고 정당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과소평가 하려는 경향마저 있는 것은 그릇된 일임을 필자는 단언하고 싶다.
그것은 후일, 김일성 일당이 남로당의 박헌영을 숙청하는 자리에서 9월 해방 혁명(?)의 실패를 그 죄목의 커다란 부분으로 지적하고있으며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적과의 모험적 또는 비판적 충돌을 꾀하려다가 수많은 애국 인민과 영웅적(?)전위들을 도살시켰고 1949년 남로당에 폭동야기를 지령함으로써 적에게 탄압의 구실을 주었다』고 하면서 9월 폭동계획의 모든 책임을 박헌영에게 전가시키고 그를 숙청하여 버린 사실인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끝으로 9월 폭동 음모와 연관된 비화아닌 비화 한 토막을 소개하려 한다.
1951년 3월12일 6·25 전란이 한창일 때 소위 인민군 대좌로 의정부 부근에서 귀순한 강동호의 증언을 들어보자.
1949년5월, 남침을 위한 회의가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무정과 박일 우등은 인민군의 무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을 내세우며 즉각 남침을 하자고 주장하였고, 최용건 등은 시기가 중요하니 좀더 두고 보자는 신중파로 갈라졌다는 것이다. 이 회의석상에서 남반부 해방에는 50일이면 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1949년7월 중앙당의 지령으로 남침을 감행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인물이나 사상적으로 이상하다고 생각된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 남침을 가정한 종합 대기 등 훈련을 실시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때 미 국무장관「애치슨」은 성명을 봉해 남한에서 미군 일부를 철수한다고 말했다.
때는 왔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1950년 8월15일 광복절에는 서울에서「해방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자고 지시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놈들은 6월25일을 남침의 날로 정했던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남침에 소요되는 시일을 50일로 줄잡고 8월15일에 해방 기념식을 하려면 8·15에서 50일을 역산하면 6·25라는 숫자가 나온다. 더군다나 1950년6월25일은 일요일이다. 기습 공격에는 안성마춤이었을 것이다』(송효순 저『대석방』중에서).
만일 이 9월 폭동이 성공하였더라면 1949년 9월에서 연말까지 사이에 남침이 감행되었으리라고 단언하여도 무방할 것 같다.
그래서 9월 폭동 음모의 중대한 의의를 필자는 실감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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