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혈기를 발산할 곳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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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몇년전만 해도 여름 장마가 지면 물바다로 변하던 곳이 내가 살고 있는 여의도였다. 작년 가을, 지금의 거처로 이사를 온 이래 강물이 넘치던 바로 그 둑 위에 아침마다 산책하는 것이 일과처럼 됐다.
정확히는 그 거리가 몇km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고희를 지난 내가 걷는데는 꼬박 두 시간이 걸린다.

<운동하는 즐거움>
새벽에 「아파트」를 나서면 한강의 안개가 자욱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비가와 을씨년스럽기도 하지만 대개의 맑은 날씨면 한강을 바라보며 산책하는 것이 여간한 즐거움이 아니었다.
여기에 또 하나 즐거움을 더해 주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 운동하는 모습이다. 원색의 운동복을 입고 달려가는 젊은이를 보면 심신이 30, 40대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는 기분이다.
특히 광장을 지나노라면 굉장한 「아파트」들이 임립한 가운데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어울려 운동하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 중에는 나 정도의 노인도 발견돼 마음으로 반갑기까지 하다.
나는 이 같은 광경을 바라보면서 최근 신문지상이나 TV 「뉴스」에 나오는 청소년들의 흉악 범죄가 왜 생길까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와 함께 학교를 정년 퇴직하기 전까지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학생들이 왜 강의에 참석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떠오른다.

<너무나 좁은 공간>
오늘 아침도 윤중제를 산책하며 잠시 이 문제를 생각했었다. 광장에서 운동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면서 새삼 우리 나라 청소년들은 너무나 좁은 공간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젊은이들이 그들의 혈기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저 광장 같은 넓은 터가 있다면 좁은 술집 같은데를 자주 가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청소년을 위한 공간의 개발이 절실함을 느낀다.
아마 여의도는 특수 개발 지구이기 때문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저 광장과 같은 공간이 제공되었으면 한결 그 기상도 활달하고 쾌활할 것 같다.
아침 산책이 하루의 기분을 좋게 하기 때문에 오후에도 요즈음은 자주 집을 나선다. 오후에는 원색의 운동복을 입은 젊은 사람보다는 한적한 윤중제를 따라 소위 「데이트」를 하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5·16 광장에도 학교를 파한 학생들이 「벤치」에 앉아 잡담을 하는 것이 더 많이 눈에 띈다.

<비행은 미리 막자>
이 중에는 앳된 고등학생들이 가방을 팽개치고 모자를 벗은 채 담배를 물고 있다. 나는 이들 앞을 지나며 준엄히 타이르기도 하지만 다시 이 같은 학생들의 「그룹」이 또 나타나기 때문에 이내 피곤해지고 만다. 그래도 역시 타이르기는 하지만 이들은 정말 공간을 활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생각돼 안타깝기까지 하다.
공공기관은 청소년, 나아가서는 우리 같은 노인들까지도 함께 즐길 수 있고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만들어야하겠다. 여의도는 주민에 비해서 남을 정도로 충분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서울은 물론 대부분의 중소도시도 시민, 특히 청소년의 건전한 활동을 위해서는 운동장 등의 시설이 너무 부족한 현실이다.
청소년 비행의 사후 처방도 중요하지만 사전에 그들이 비행에 빠지지 않도록 건전한 장소를 제공해 준다는 것은 더욱 바람직스런 일이다.
그러나 이미 있는 시설도 활용하는 사람들이 오후의 산책길에서 만난 학생들처럼 담배나 피우고 여학생과 잡담이나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다. 시설도 시설이려니와 이용자들도 그것을 선용할 줄 아는 시민 정신을 좀더 함양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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