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로 다시 읽는 일본 현대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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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현대시를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시선집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판사 문학수첩에 의해 출간된다. 그동안 엄격한 정형률을 따르는 하이쿠(俳句)나 일부 근대시인, 극소수의 일본 현대시인이 소개된 적은 있었지만 자유시를 쓰는 일본 현대시인들의 시선집이 출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출판사는 우선 다이 요코(臺洋子.40)의 '잠자는 거리 혹은 가라앉는 지층'과 시바타 산키치(柴田三吉.51)의 '나를 조율한다', 혼다 히사시(本多壽.56)의 '7개 밤의 메모' 등 세권을 펴냈다. 이들 세 시인은 시선집의 편집위원이 돼 앞으로 출간될 시인과 시집을을 선정할 예정이다. 문학수첩은 이런 방식을 통해 모두 30권까지 선보일 계획이다.

세권의 시집 중 다이 요코의 '잠자는 거리…'가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정육면체'라는 시에서 시인은 사람들이 한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걷거나 달려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일정한 한 면만을 '정면'이라고 결정한 채로, 미끄러지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정면'은 누구의 눈에도 좋아 보이도록 맨들맨들하게 잘 닦여 있다. "당신이나 당신 이외의 사람들과 마주 보는 면은/언제나 각성시켜 잘 연마하여/약간의 트러블에는/도덕적이고 인도적인 포즈로/아슬아슬 벗어날 수 있을 정도는/단련되어" 있는 것이다.

반면 측면.등 뒤쪽.밑바닥은 보이고 싶지 않다. 누군가 "의외의 면이 있군요"라고 측면을 지적하면 당황하게 되고 무방비하게 노출시켜 놓은 등 뒤쪽은 비뚤어지거나 더러워지지 않았나 해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다. 밑바닥은 뒤집히면 무엇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다.

1963년 도쿄에서 태어난 다이 요코는 '개를 부르는 사람''영혼시장' 등 세권의 시집을 내 주목받고 있는 여성이다.

시바타 산키치는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시인으로 꼽힌다.

이번 시선집은 시바타 산키치가 89년 이후 발표한 시들 중에서 가려뽑은 것이다. 그는 상처를 입힌 자에게 항의하기보다 먼저 깊이 다쳐, 그 아픔을 격렬하게 아파하는 민감한 통각(痛覺)을 바탕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살기 어려운' 세계에 대한 이의 표명을 시적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후 80년대 문화인류학의 연구성과 등을 받아들였고, 이번 시집에 들어있는 시편들에서는 비애와 고뇌, 실의와 함께 희망도 노래한 것으로 평가된다.

시인 혼다 히사시는 장대한 신화적 세계를 남성적 시선으로 전개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시선집에 수록된 시들은 그의 첫번째 시집 '피뢰침'에서부터 99년에 출간된 일곱번째 시집 '재와 불과 수목과 그림자와' 중에서 가려뽑은 것이다.

시바타 산키치가 '나를 조율한다' 작가 후기에서 밝혀 놓은 것처럼 "시는 번역으로 잃어버리는 무엇"일 확률이 높다. 일본 현대시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겠다는 기획 의도도 조금 느닷없다. 하지만 문학수첩 김종철 주간은 "일본 소설이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고 국내에도 활발히 소개된데 비해 일본 현대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시는 소설에 비해 결코 빈약하지 않다"고 말했다.

시선집을 번역한 시인이자 번역가 한성례씨는 "일본 현대시가 일본 문학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한국시의 그것과 비교해도 작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 배경에는 군국주의 체제 찬양에 나섰던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으로 일본 현대시인들이 '난해함' 속으로 빠져든 탓이 크다"며 "때문에 시선집에 소개한 시인들의 시 세계는 쉬우면서도 깊이가 있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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