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백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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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국판 크기에 양장을 한 4백68「페이지」의 책. 표지를 열면 원색화보가 눈길을 끈다. 대한 적십자간 『이산가족백서』-. 서울에서 열렸던 제2차 남북적 회담 광경은 어느새 단절의 시간을 느끼게 한다.
화보의 면면 속엔 6·25의 참상을 일깨워 주는 피난민의 군중이 펼쳐져 있다. 대동강철교의 난간을 타고 넘는 시민들, 눈보라 속을 끝닿은 데 없이 헤치고 가는 보따리의 대열. 뼈 저렸던 상처가 다시금 아픔으로 살아나는 것 같다.
우리 나라의 이산가족은 20세기 인류의 비극 가운데서도 가장 비참한 단면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사의 어지러운 굴절 속에서 우리만이 유독 가혹하게 겪은 고통이며 슬픔이기 때문이다.
1922년 이미 일제의 전시 노무동원체제에 의해 우리의 가족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1931년의 만주사변, 1937년의 중일전쟁, 1940년의 소위 일제 「국가 총동원법」등은 어느 한시도 우리의 가정에 평화를 안겨 주지 않았다.
2차 대전 종전 무렵까지, 일제의 소위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용으로 동원된 우리동포의 수는 4백59만2천명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일본·「사할린」·남태평양 등 외지로 연행된 자는 72만 명 내지 82만 명에 이르렀다. 한편 자의든 타의든 중국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1백여 만 명에 달했다. 1946년 5월26일 한국의 미군정청 발표에 따르면 그 무렵까지도 해외에 남아 있는 우리 동포의 수는 2백만 명을 헤아렸다.
한국동란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가족 이산의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동란 전 남하한 피난민 수는 3백37만, 동란 후 남하한 피난민은 3백50만 명.
「이산가족백서」는 『이들의 대부분은 가족의 일부를 북한에 둔 채, 혹은 단신으로 월남한 사람들』이라고 지적했다.
대한적십자는 그 동안 국제적십자사의 도움으로 이산가족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1957년11월에 입수한 3백37명의 명단뿐이었다. 그밖에 월남자의 제보 등을 수집, 따로 집계, 1백60여명의 안부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도 모두가 10여 년 전의 소식을 담고 있을 뿐이다.
대한적십자사의 이와 같이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적십자사는 그 깃발이 무색하다. 끝내 벽을 더욱 높이 쌓고 있다.
1971년8월12일 대한적십자사의 남북적 회담 제의는 마치 닫힌 하늘이 열리는 것과 같은 감격과 기대를 주었었다. 그후 무려 일곱 차례의 남북적 본회의를 거듭했다. 그러나 하늘은 끝내 열리지 않고 있다.
지난봄 「제네바」에서 열렸던 국제인도법회의는 「가족의 재회」를 「가족의 욕구」아닌「가족의 권리」로 규정한바 있었다. 「백서」를 뒤적여 보며 적십자의 깃발에 아직도 일말의 희망을 거는 것은 그 정신을 믿는 때문이다. 어제 창설 71년을 자축한 대한적십자사의 소리 없는 봉사와 사랑의 정신을 다시 한번 우러러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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