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도 100%의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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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스페인 영화를 대표하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녀에게' 안에는 환한 기쁨과 싸한 슬픔이 병존한다. 1백%의 조건 없는 사랑에 가슴이 훈훈해지다가도,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운명 앞에선 가없이 쓸쓸해진다. 삶의 즐거움을 넉넉하게 품어안으려는 감독의 뜻은 쉽게 알아챌 수 있으나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시린 아픔은 어쩔 수 없다.

뇌사 상태에 있는 무용수 알리샤(레오노르 발팅)를 4년째 돌보는 남자 간호사 베니그노(하비에르 카마라).

그는 아무런 감각 없이 침상에 누워 있는 알리샤에게 상상을 초월한 정성을 기울인다. 손톱 손질, 머리 감겨주기는 기본 중 기본. 자기가 본 영화나 연극 얘기를 자세히 들려주고, 전신 마사지도 거르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집 건너편 무용 강습실에서 춤을 추던 알리샤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그는 그녀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자 자기의 모든 걸 던져버린다.

여행잡지 기자 마르코(다리오 그란티네티). TV 토크쇼에서 여자 투우사 리디아(로사리오 플로레스)의 실연 소식을 들은 그는 리디아를 취재하기로 결심한다.

깊게 사랑했던 젊은 여성과 헤어진 아픔을 갖고 있는 마르코는 리디아와 서로 상처를 감싸주는 관계로 발전한다. 하지만 투우장에서 리디아는 소의 공격을 받고 온몸이 굳어버리고….

'그녀에게'는 식물인간이 된 두 여성을 사랑하는 두 남자의 얘기다. 저런 남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여성에게 헌신하는 베니그노와 목석처럼 변한 애인과 더 이상 얘기할 수 없다는 것에 괴로워하는 마르코, 병원에서 마주친 그들은 자신들의 비슷한 처지에 공감을 느끼며 사랑과 우정에 대한 이해를 넓혀간다.

뼈대만 놓고 보면 '그녀에게'는 흔한 멜로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독은 이들 넷의 관계를 과거와 현재, 또 현실과 초현실을 오가며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다.

영화 들머리, 세계적 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베니그노와 마르코를 클로즈 업하며 이들이 향후 서로 의지하는 사이로 진전할 것으로 암시하는 건 작은 예에 불과하다.

주변에서 바보 취급 당하는 베니그노가 알리샤에 대해 느끼는 미묘한 감정을 흑백 무성영화 '애인이 줄었어요'를 통해 은유하는 것도 꽤나 재치있다.

'영화 속 영화'를 새로 만드는 등 다양한 형식을 시도했다. 마르코와 리디아가 서로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은 브라질 가수가 들려주는 '쿠쿠루쿠쿠 팔로마'의 구성진 선율로 표현했다.

'그녀에게'는 미스터리 분위기도 풍긴다. 병든 어머니를 돌보는 데 10년을 보냈던 마르코가 리디아에게 집착하는 게 정상인지 아닌지, 리디아를 성추행한 혐의로 투옥되는 마르코가 진정 범죄를 저지른 것인지 등등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남겨둔다. 관객이 상상력으로 해결할 부분이다.

하지만 그건 영화의 일부분일 뿐. 영화는 인간 사이의 소통을, 나아가 사랑을 말한다.

남성과 여성의 고정 관념을 부수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러면서도 기조는 경쾌하고 유머스럽다. 알모도바르 감독 특유의 기괴한 농담과 황당한 화면이 크게 얌전해져 부담감도 작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2002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했고, 올 아카데미 영화제는 각본상을 안겨줬다. 다음달 18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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