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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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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7년간의 직업군인 생활을 청산한 J씨(38)는 퇴직금에서 50만원을 꺼내 이민초청장을 구입했다. 그는 수속시작 1년이지나 작년 7월15일 「파라과이」의 「아순시온」공항에 가족을 이끌고 내렸다.
초청장을 보내준 사람은 『전에는 장사가 잘됐는데 요즘은 워낙 한국이민이 많이 들어와 경쟁하는 바람에 재미가 덜하다』고 넌지시 말했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으면 항상 「벤데도르」밖에 할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넓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자식들 공부를 시켜보겠다고 떠나온 J씨는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한달 가까이 농촌을 돌아다니며 살 곳을 물색했지만 맨발의 원주민들이 수준이하의 생활을 하고있는데 실망했고 더구나 자식들의 공부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됐다. 결국 두달 뒤에는 그도 영락없는 「벤데도르」가 됐다.
이민올때 가져온 옷가지를 내다 팔다가 나중에는 부인이 만든 옷을 들고 나가 팔았다. 첫날 하루종일 돌아다녔으나 겨우 한 벌밖에는 팔지 못했고 다음날은 4벌을 팔 수 있었다. 한달쯤 지나니 제법 이력이 붙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박수를 쳐 주인을 불러내는 일에 익숙해졌다. 그럭저럭 밥을 먹을 수 있게됐다.
J씨는 『가는 곳마다 부딪치는게 한국 동포들이고 「파라과이」사람들이 「당신네들은 모두 보따리장사만 하느냐」고 했을때는 그짓도 못해먹겠더라』고 했다. 날이 갈수록 행상하는 한국인은 늘어나 경쟁마저 벌이게되니 돈벌이도 시원찮게 돼갔다.
무슨 새로운 방도가 없을까고 궁리하던 J씨는 「브라질」로 가면 낫겠지 하는 희망을 좀 갖고 지난6월 초 「상파울루」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니 영주권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공포와 불안뿐이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보니 당장 거처할 셋방 구하기도 힘들었다. 겨우 제2의 한국촌으로 알려진「모카」뒷골목에 셋방을 얻었다. 이곳에는 약 3백 가구의 동포들이 모여 주로 틀일(미싱)로 옷가지를 만들고 있다.
영주권이 없는 그는 마음놓고 외출할 수도 없는 처지여서 집안에서 일하는 부인을 도와 고작 밥을 짓던가, 애들을 돌보며 틈틈이 들일을 하는게 일과였다. 서울에서라면 어림도 없는 한심한 처지에 빠진 J씨는 그렇다고 비관할 틈도 없었다. 겨우 석달이 지나 이제 막 살길을 찾나보다했는데 지난9월3일 「브라질」의 합동수사대가 들이닥쳤다. 그는 「파라과이」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지만 살일을 생각하니 그저 막막할 뿐이라며 눈물을 홀렸다.
침술사 K씨(35)는 남미에서도 침술이 괜찮다는 뜬소문을 믿고 74년11월 「파라과이」로 이민왔다. 그러나 1년 이상 침술의원 허가를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당초에 허가되지 않은 업종이라 바라던 의원개업을 할 순 없었다. 오직 한국인을 상대로 침을 놓아 생계를 해결했다. 그는 작년말 3개월 기한의 관광 「비자」를 얻어 「상파울루」로 왔다. 역시 침술사 허가를 얻을 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3세짜리 딸이 대정맥종양을 앓고있으나 수술비 90만원을 마련하지 못해 애만 태우고있다. 영주권이 있으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은곳이 있지만 관광「비자」로서는 사정이 통할 리 없다. K씨는 「파라과이」로 돌아가 「마사지」가게라도 차려야겠다고 했지만 얼른 가고싶은 심정은 아닌 듯.
전직 경찰관이었던 S씨(36)는 관광「비자」를 얻어 「파라과이」에서 「브라질」로 또한번 이민한 「케이스」. 「아순시온」에서 두달 동안 행상을 했지만 찌는 듯한 더위와 왕 모기의 습격에는 견뎌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상파울루」의 한국촌8평짜리 「아파트」방에서 「미싱」을 들여다 놓고 부인과 함께 하루 20시간씩 일을 하지만 8세된 아들을 아직 학교에 보내지는 못하고있다.
더구나 영주권이 없어 늘 불안하다. S씨는 『누가 이민 오겠다면 앞장서서 말리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민의 정착과정에서 초기의 시련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기반을 다질 수가 없다. 이미 성공한 많은 동포들은 그보다 더한 정신적·육체적·경제적 고난을 딛고 일어선 것이다. 그것은 마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한 시련과도 같은 것이다. 「브라질」교포사회는 계와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로가 생계와 생업에 바쁘다가 적어도 한 주일에 한번정도씩 계모임과 교회예배를 통해 얼굴을 맞댄다.
특히 계는 동포들의 사업기반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민초기엔 고국을 떠난 외로움을 달래고 생활정보를 교환하는 친목위주로 시작됐으나 4, 5년이 지나면서부터 계를 통해 사업자금을 마련했다.
계가 생긴 동기에 대해 고광순씨는 1차 이민이 도착한 후 서로 얼굴도 잘 모르는 50여가구가 직업이나 생계수단도 못 가지고 시간만 허비할 수도 없고 해서 생계수단을 찾기 위한 정보교환과 친목을 위해 11가구가 먼저 시작했다고 말했다. 초기에는 물론 한국에서와 같은 제비뽑기식으로 개를 운영했다. 액수도 얼마 안돼 1백「크루제이로」(당시약30「달러」)정도였다. 【상파울루=허준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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