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제일인자 화국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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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모택동이 죽은지 한달 만에 모가 가지고 있었던 거의 모든 직책을 이어받아 중공의 제1인자로 등장한 화국봉은「베일」속에 싸인 인물이다.
지난 2월 주은래 중공수상이 죽고 나서 국무원 서열 제6번의 부수상 겸 공안상이었던 화가 수상대리로 임명 됐을 때 세계는 그 소식을「충격」으로 받아들였었다. 농업문제 전문가이고 중공의 경찰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그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외부의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은 의외일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백80㎝의 큰 키에 언제나 입가에 웃음을 흘리는 화의 정확한 출생지와 연령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는 모의 실종된 3번째 아들 모안룡이라는 설까지 낳기도 했다.
그는 대략 59∼64사세로 추측되며 그의 사투리로 보아 호남성 출신이라기보다는 산서성 출신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37년께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게릴라」전에 참가했을 것이라는 추측 외에 그의 젊은 시절을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중공건국 후 산서성의 현 당 위원회 서기로 출발한 화는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으나 노력형으로 복종심이 강했다고 한다. 그의 경력은 55년부터 대체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모의 출신지인 호남성 상담현지구 위원회 서기로서 그는 농전 수리에 성과를 올려 농업 전문가로 주목됐다. 58∼67년에 걸쳐 호남성 인민위부성장을 역임한 화는 68년 문화 대혁명 때 홍위병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이것을 극복하고 성혁명위를 구성, 부주임이 됐다.
1년 후 중공9기 전국대표대회의 주석단으로 중앙위원에 선출된 그는 75년 부수상이 될 때까지 순탄하게 성장했다.
화가 정말 모의「의중의 후계자」였다면 그것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될 수가 있다. 우선 그는 모가 중공을 건국한 후 2번의 정치적 곤경에서 모의 편을 들었다. 58년 대약진·삼면홍기 정책의 실패로 모가 국가주석의 자리를 유소기에게 물러주고 한때 물러났을 때 화국봉은 대약진 운동을 적극 지지했다.
또 71년 모의 후계자로 지명됐던 임표의 소위「쿠데타」음모사건 때 그는 왕홍문·기등규와 더불어
이 사건을 조사하는 특별 조사위원으로 활약했다.
호남성 시절당 기관지『학습』지에 실린『농촌 각 계급의 동태를 충분히 파악하자』는 논문이나 최근『농업은 대안에서 배우라』는 그의 주장은 모 이론의 연장에 불과하다.
화를 만난 외국인들은 그가 아주 예의 바르고 현실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배경에 주재하는 한 외국대사는 그를 만나고 와서『화는 커다란 고양이 같다. 그러나 겉모습에 속지 말라. 그는 발톱을 드러낼 수 있는 위인이다』라고 평했다. 화국봉이 모택동 없는 모 사상을 과연 어떻게 밀고 나갈지가 주목거리다. <김영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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