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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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부처중에 미륵보살이 있다. 석가가 이승을 떠난 해부터 정확히 56억7천만년 후에 이승에 돌아와 중생을 구제한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이라면 석가도 없고 미륵도 없는 요새는 말세나 다름없다. 석가의 말을 빌면 1052년 이후부터 세상은 말세에 들어갔다.
어떻게 보든, 요즘은 말세라는 소감이 절실하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는 누구나가 오탁으로 가득찬 말세라는 생각에 젖어 있다면 사람들이나 이 세상은 구제될 가망은 있는 셈이다.
그렇지 못한 느낌만이 짙어지니 탈일 뿐이다.
세상을 벌컥 뒤집어 놓은 여 운전사 살해범 박에게는 조금도 뉘우치는 빛이 없었다.
여 운전사를 왜 죽였냐는 질문에도 『운 나쁘게 우리가 서 있던 곳을 지났을 뿐이다』라고만 대답했다고 한다.
중국말에서는 파렴치한 놈을 「망팔」이라고 한다. 효·제·충·신·인·의·염·치의·여러 가지를 잊어버린 놈이라는 뜻이다.
망팔 보다도 더 심한 욕으로는 망팔단이라는 말을 쓴다. 단이란 달걀의 뜻이다. 진범 박에게는 망팔단보다도 더 심한 욕이 어울릴만하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자기가 나쁜 일을 저질렀다는 뉘우침이 있으면 악을 벗어날 길이 트인다. 박에게는 그런 빛이 전혀 없었다.
박에게는 여죄가 엉뚱하게 많았다. 서구에서 가끔 1백 몇십년이라는 금고형이 선고되는 것은 여죄들을 모두 가산하는 때문이다. 그러나 여죄란 대개는 본죄보다 가벼운 것이 보통이다. 가령 강도가 살인을 한 다음에 장물을 불법 처분 한다든가, 체포될 당시 경관에게 폭력으로 맞선다든가 하는게 여죄 속에 든다.
박에게는 여죄들이 본죄에 못지 않게 끔찍했다. 그 자신이 자백한 여죄는 「택시」 강도만도 19회가 되었다. 한강변에서 여자 승객을 살해한 일도 자백했다.
이밖에도 절도 사건 1백91건, 폭력 사건 11건 등 모두 2백71건의 여죄가 드러났다.
그에게 범죄 생활 10년의 경력이 있었다고 본다면 10일에 한번씩 범죄를 저지른 셈이 된다.
금년 들어 「택시」 강도만도 2개월에 한번씩 저질렀다.
이만한 범죄자가 버젓이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딱한 것은 살인을 포함한 그 많은 여죄들의 피해자들이 대부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죄들을 경찰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못된다.
이번 사건은 「대단찮은 신고 내용」이라고 경찰에서 봤던 것이 단서가 되었다. 이런 것이 더욱 시민들이 신고를 꺼리게 만들었을까, 아니면 신고하기에도 역겨울 만큼 「망팔」들이 늘어났기 때문일까, 어쨌든 건강한 세상이 못되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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