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청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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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중복을 지나 입추에 이르면서 무더위가 한층 맹위를 떨치고 있다. 언어상으로야 시원한 가을을 상징하는 입추를 맞았지만, 실제로 더위는 이제부터라는 것이 한국적 절후의 특색이다.
이 무더운 여름에 우리는 두차례 시원한 빗줄기를 맞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숨막히듯 오래 지속했던 가뭄을 일거에 해갈시킨 엊그제 자연의 소나기와 또 지난 주말 「몬트리올·올림픽」에서의 쾌보가 안겨준 거족적 희열의 한순간-. 정신 건강을 위해 이 이상 더 시원한 청풍이 또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나 「금세기의 가장 덥고 건조한 여름」이라고 할만한 이상 기후가 전 지구를 덮고 있는 올 여름이 누구에게나 고통스런 것임엔 틀림이 없다.
오랜 가뭄은 한여름의 무더위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더욱 괴롭혔고 농작물을 말려 식량난의 가중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태계의 고통보다도 더 숨막히는 것이 요즘 세태 일반의 정신적 빈혈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무더위에 지치고 환경에 부대낀 동물적 인간들의 광기가 미상불 사회를 변조로 몰아넣고 있다면 과언일까.
불쾌지수가 높을 때 불만이 고조되고 싸움이 잦다는 것은 조화의 사실이다. 욕구 불만이 큰 사람은 무더위 때문에 끔찍한 사고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런 만큼 가뭄과 무더위를 피해 심산유곡을 찾아 마음의 열화를 식히고 해수욕장에서 즐거운 휴가를 보내려는 인파가 몰리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본능적 욕구이자 정신 위생상의 양약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양이 모자라고 참을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갈증을 풀고 불만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도리어 더 큰 불만과 마음의 열화를 몰고오는 수도 있는 것이다.
자연은 아름다운 것이며 산천의 미를 즐기려는 마음 또한 값진 것이지만, 그것이 각자의 형편을 무시하고 기분에 따라 걸맞잖게 추구될 때 갈등이 불가피하게 된다.
이 경우의 정신적 좌절은 오히려 더 클 수 있으며 유흥비 마련을 위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사태에 이르면 그 염열같은 탐욕은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기까지 할 것이다. 그 점에서 세태의 욕망을 억누르고 고행과 수도에 몸을 던져 마음의 청풍을 바라는 수도자들의 태도는 이런때 일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아니, 그들만이 아니라 더위속에서도 학업에 열중하며 땀의 보람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사람들-. 밝은 미래의 업적을 위해 면학하는 학도들. 어려운 살림살이에 시달리면서도 가정의 평화를 능동적으로 창조해가고 있는 한국 가정의 주부들, 그리고 자기의 작은 정성을 봉사활동에 불태우는 젊은이들의 보람은 역시 수도자의 그것에 상통하는 바가 있다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시원한 여름」은 물질적인 세계, 사욕의 세계에서보다 우리 내면의 세계, 마음의 세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
수려한 경관과 아름다운 산천은 실상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만의 것이다.
탐욕의 불을 키우고 자만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며, 겸손할 줄 모르고 간지를 농하는 사람들은 외형적인 행복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심신이 함께 참으로 시원한 여름을 살지는 못할 것이다.
진실로 무더운 여름 가운데서 시원한 삶은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것이며, 청량한 마음을 가진이들의 것이며. 무량의 지혜를 발하는 이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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