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5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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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기형도

아무래도 시신(詩神)이란 것이 있나보다. 시인은 그저 몸만 빌릴 뿐 시의 귀신이 숨어서 리모컨으로 조작을 해주는.

또는 이런 얘기도 있다. 시인은 신만이 아는 것을 자꾸 알려고 해서 천재시인은 일찍 데려간다고도. 시어로 '죽음'을 자주 쓰는 시인은 명이 짧았다.

무슨 징크스일까? 김민부.이현우는 몇 편 안남긴 시에 촘촘히 '죽음'을 박아 넣더니 제명을 못채우는 불귀의 객이 되었고, 기형도가 그랬다.

기형도는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다. 나는 기형도를 알기 전에 그가 육필원고로 응모한 '안개'를 먼저 보았다.

나는 다른 쪽의 심사를 맡고 있었는데 시 부문의 심사를 하던 김규동 시인이 "이 시가 어떠냐?"고 내게 보여준 작품이 '안개'였다. 이미 당선작으로 정해놓고 보여준 것이겠지만 꼼꼼하게 쓴 글씨며 문체에 힘이 들어 있었다.

김주영.정규웅과 나는 한동안 인사동에서 자주 뭉쳤었는데 정규웅이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맡고 있던 86년 어느 날 기형도를 데리고 와서 처음 그를 만났다.

기형도는 60년 경기도 옹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다. 중앙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 연세대 정법대에 다닐 때는 '박영준 문학상'을 탈 만큼 글재주가 남달랐다.

시로 등단하기 직전인 84년 10월 중앙일보에 입사했는데 경찰출입에서 정치부로 옮긴 그가 하루는 정규웅에게 와서 귓속말로 "문화부에서 일하게 해주세요"하더란다.

'시'란 놈이 그를 문화부에 마음 두게 했을 것이다. 뜻대로 기형도는 문화부로 왔고 정규웅은 부하 직원인 그를 우리 판에 붙인 것이다.

술자리가 벌어지면 안주로는 외설이 으뜸이었고 다음 순서는 한 곡조를 뽑아야 했다. 김주영의 '작은 연인들', 정규웅의 '아침이슬'은 18번이었고 나의 음치도 그들 때문에 치료가 되고 있었다.

그중에도 좋은 목청을 타고 나서 동석한 새내기 여류들을 독점하는 사람이 문학평론가 정현기였는데 거기에 기형도가 도전장을 내었다.

운동권 노래에서부터 트로트까지 레퍼토리가 무궁무진한 기형도는 정현기의 특허품인 '한계령''로미오와 줄리엣'등을 맞서서 불러댔다.

정현기의 노래가 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는 것이라면 기형도의 노래는 박하사탕처럼 톡톡 쏘는 맛이 있었다. 목을 길게 빼고 혼신의 소리를 뽑던 구성진 가락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등단시 '안개'에서 부터 '방죽 위에 취객 하나가 얼어죽었다'로 시작해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오래된 서적)등 그의 시에는 안개.어둠,검음.죽음 등이 짙게 깔려 있었다.

스물 몇 살의 총각이어서 어느 처녀를 좋아하느니라며 주위의 놀림도 자주 받던 기형도는 '죽음'을 시로 자주 입 밖에 낸 탓인지 89년 3월 7일 새벽 짧은 삶을 마감한다.

그의 1주기를 맞아 김종해.이탄.김주영.정현기.정진규.정규웅 등 우리 패거리는 봄나들이 길에 그가 묻힌 안성천주교 묘지를 찾아 술잔을 부었다. '입 속의 검은 잎'에서 내뿜던 시와 노래, 이 봄에 다시 피거라.

이근배 <재능대교수.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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