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전에로의 회귀|「파리·비엔날레」 참가기-이일 <미술 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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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파리·비엔날레」는 전위 미술의 첨단을 보여주는 세계 청년 화가들의 실험장으로 정평이 있다. 지난 9월19일부터 시작, 오는 10월2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회에는 한국 화가들도 참가하고 있다. 이 글은 최근 이 「비엔날레」를 보고 귀국한 이일 교수 (홍대·미술 평론)의 참관기.
출품 자격을 35세 미만의 작가로 규정함으로써 (59년) 각종 국제 전 「러쉬」속에 「유니크」한 위치를 확보해 온 「파리·비엔날레」도 올해로써 9회 째를 맞고 있다. 그동안 이「비엔날레」는 그 본래의 취지대로 현대 미술의 온갖 새로운 가능성을 가늠하는 일종의 실험장이기를 지향해 왔었다.
이번 「비엔날레」에 선정된 출품 작가는 28개국의 1백23명. 이 출품 작가를 다시 지역별로 보면 서구가 73명 (그중 12명이 「프랑스」작가), 미국이 27명, 「아시아」 지역 (일본과 한국)이 9명 (그중 2명이 한국 작가), 동구 9명, 기타 지역 5명 (그중 남미가 3명)의 분포도를 보이고 있다 (한국서는 심문섭씨와 이강소씨가 참가).
전람회장 전체에서 느껴지는 종잡을 수 없는 번잡함, 어리둥절함을 금치 못하게 하는 당혹감, 하소연할 곳 없는 허탈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이러한 느낌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라든가. 또는 견문 없이 「사건의 현장」에 들이닥친 나 자신의 몽매함 탓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필자는 그때까지만 해도 「예술」이라고 하는 어떤 미련스러운 여운에 말려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내 눈앞에 벌어진 것은 그 「예술」의 허울을 깡그리 내동댕이친, 차라리 앙상할 이 만큼 헐벗겨진 그대로의 「상태」들이었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어떤 예술적 「콘텍스트」속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한계, 또는 구조에서 완전히 이탈된 각기 뿔뿔이 단절된 채로 있는 완전히 무명이요 무표정의 상태, 예술에 의해서거나 문명에 의해서거나 조건 지어지지 않는 일종의 구조화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어쩌면 그렇게도 철저하게 안 그리려하고 안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 그것이 바로 오늘의 미술의 주요 기조를 이루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이 여기에서는 하나의 편집 광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도처에 눈에 띄는 것은 도표·문자, 그리다 말고는 다시 그것을 지워버린 것 같은 『의미 심장한』「에스키스」의 반복, 그리고 사진, 또는 위장 현실화된 일상적 「오브제」 등등 ….
시쳇말을 빌건대 탈 학술·탈 문명에로 치닫는 이 일련의 동향에서 또 한가지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이들 거의 모든 시도의 발상이 작가의 극히 내밀적인 사적 체험에서 연유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현대 문명이라는 『닫혀진 상자』속에 놓인 인간의 조건이 필경은 인간으로 하여금 불안스러운 고독 속에서 자신을 뒤적일 수밖에 없게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오늘의 예술가들도 어쩔 수 없이 어떤 초월적, 또는 내재적 세계의 설정 내지는 그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에 앞서 자기 자신의 체험을 기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동시에 그는 그처럼 소외된 인문 조건을 고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번 「파리·비엔날레」를 통해 본 오늘의 미술에는 어떤 주류도 없거니와, 주도적인 작품 내지는 이념도 없는 듯이 보인다. 아니, 예술적 이념을 운운하기 전에 예술 그 자체의 행방이 묘연하다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는 이 「비엔날레」에서 그 어떤 예술의 겉치레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현대 미술의 공백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오늘의 미술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바로 예술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해 예술 이전에로의 회로를 더듬고 있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제9회 「파리·비엔날레」 9월19일∼10월2일까지, 「파리」국립 근대 미술관 및 「파리」 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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