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련의 트렌드 파일] '멋보다 실용' 편리함을 디자인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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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상품의 특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압축된 이미지, 혹은 구매 욕구를 자극하는 세련된 포장? 전통적 의미에선 디자인에 대한 이런 설명이 맞다. 그러나 최근 업계는 실용성에 점차 눈을 뜨고 있다. 미적인 요소보다 기능성에, 세련됨보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일본 마쓰시타의 경사 드럼 세탁기를 살펴보자. 니혼게이자이신문에서 히트 상품으로 선정한 이 제품은 보통의 드럼 세탁기보다 드럼의 창이 30도가량 기울어 있다. 보기엔 다소 엉성해 보일지 몰라도 키가 작은 사람도 쓸 수 있으며, 집안의 공간 효율 측면에서도 후한 점수를 받았다. 예쁘진 않지만 단순한 디자인의 듀오백 코리아의 의자도 오랜 시간 편하게 앉을 수 있는 기능성 덕분에 '장기 베스트셀러 제품'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른바 '이건희 폰'이라 불리는 삼성전자의 휴대전화도 자판이 크고 활자가 잘 보이도록 만들어 장년층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러한 상품들은 사용의 편리성을 강조하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대표적인 예다.'유니버설'이란 단어처럼 이런 디자인엔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의'란 취지를 담고 있다. 성별과 연령, 장애의 유무에 상관없이 사용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디자인은 물론 포장과 광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쓰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유니버설 디자인의 개념이 적극 적용되고 있다.

베네통이 광고에 백인.흑인.동양인 모델을 동시에 사용하고, 스페인 브랜드 '자라'가 상표에 주요 국가들의 국기를 나란히 병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영화로 따지자면 뻔한 스토리지만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전 세계 남녀 누구나 보고 즐길 수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비견된다고나 할까.

물론 아직도 전자제품의 전반적인 트렌드는 '컨버전스(convergence)'다. 디지털카메라에 MP3 기능이 장착되고, 사용 설명서를 읽는 데만 며칠씩 걸리는 최첨단 휴대전화가 신세대 젊은이들에겐 폭발적인 반응을 끌 순 있어도 모든 세대를 아우를 순 없다. 나이가 들고 과거의 추억으로 먹고사는 노인들에게 이런 기계는 한낱 골치아픈 것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도 2010년이 되면 50대 이상 시니어 세대 비중이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할 것이며 이들의 소비 규모가 117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이 최근 보도된 바 있다. 불과 5년 뒤다. 실버 시장은 이제 결코 변두리 시장이 아니다.

이것 저것 바르느라 순서 외우기도 힘든 화장품에도 이를 적용해 보면 어떨까. 화장품 용기에 순서를 숫자로 표시하거나 해와 달을 그려 낮에 바르는 것과 밤에 사용하는 것을 구별시켜 준다면 소비자는 부담없는 마음으로 이런 제품들을 사 쓸 것이다. 일본 트라이포드의 가위는 한쪽 손잡이를 터서 왼손잡이도 사용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젊고 건강하고 판단력이 있는 사람만 소비층이 아니라는 사실, 선진화될수록 노약자나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중요해 진다는 점. 현대 기업들이 간과해선 안될 사항들이다.

김해련 ㈜아이에프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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