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라시에 황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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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디오피아」의 전 황제「하일레·셀라시에」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작년 9월 군사「쿠데타」로 황제 최후의 날을 맞았으며, 이제 또 다시 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날을 맞았다.
「셀라시에」는 기원전 「이스라엘」유대국의 왕 「솔로몬」의 직계후손을 자칭, 자기를 「나구스·나가스트」(Nagus Nagast)라고 불렀었다. 「왕중 왕」이라는 뜻.
과연「왕중 왕」답게 그는 19세기말 「메네릭스」여 황제아래서 섭정 14년, 자신의 군림 44년으로 무려 반세기도 넘게 황제의 좌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권좌에서 밀려나던 날, 연도에 늘어선 주민들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이 도둑아! 도둑아!』하고 주먹질을 했다는 외신이 있었다.
이런 광경은 그의 통치가 어떤 것이었나를 짐작하게 한다. 「이디오피아」는 주민의 90%가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소유한 토지는 전가경지의 20%남짓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황족의 땅(45%), 아니면 국교인「이디오피아」정교의 토지(28%)였다.
외국 잡지에 소개되는「이디오피아」의「르포」사진들은 그런 상황들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뭄이든 광대 무변한 황야에서「이디오피아」의 농민들은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낟알을 줍고 있는 광경이었다. 한편 황제는 남국의 정취가 깃들인 황금 정원에서「그레이트·딘」(고급 견의 일종)을 모아놓고 미식을 주는 모습의 사진도 있었다.
그의 임종과 함께 외신은 은닉재산이 무려 1백50억 「달러」에 이른다는 보도를 하고있다. 군사정권은「쿠데타」이후 황제의 재산문제로「스위스」정부와 시비를 겪은 일도 있었다. 재산의 대부부은「스위스」은행의 비밀구좌에 있다고 한다.
1백50억 「달러」는 원화로 치면 7조5천억원 상당이다. 「이디오피아」인구 2천6백만명에게 이 돈을 나누어 준다면 1인당 3백만원씩 돌아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설마?』하는 느낌도 든다. 「셀라시에」가 자신을「솔로몬」의 직계라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신화적 고장인 것 같다. 어떠면 그도 한 인간의 감각을 갖고 있는 자연인이고 보면 설마 그 많은 재산을 쓸모도 없이 그렇게 무위하게 쌓아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이것과 그의 학정은 별개의 문제지만.
「이디오피아」는 우리와는 지구의 저편에 있는 먼 나라. 하지만「셀라시에」황제가 몸소 방한을 할만큼, 그렇게 소원한 나라는 아니다. 6·25동란 땐 참전도 한 우방의 하나이다.
이제 황제의 최후를 보며 「이디오피아」는 깊고 어두운 잠에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 신화와 백일몽의 시대는 지났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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