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칼럼] 反戰을 묻는 막내딸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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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등학생인 막내딸이 "아빠, 이라크 전쟁을 하는 미국이 나쁜 사람들이지?"하고 물었을 때 나는 당황했다. 전쟁은 나쁘고 평화는 좋은 것이라는데 할 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아이에게 복잡한 국제질서를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지 답답했다. 세계 곳곳의 반전데모는 전쟁은 악(惡), 평화는 선(善)이라는 도식을 강화하고 있다. 그 악의 대변자가 미국이 된 것이다. 과연 그럴까.

*** 국제정치를 보는 두개의 눈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은 상대적으로 평화의 이상을 추구하는 나라였다. 그들은 유럽 대륙의 끊임없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아예 고립해 살자는 먼로주의를 채택하기도 했다.

제국주의가 창궐했을 당시 강대국 가운데 유일하게 타국의 영토에 욕심을 내지 않았던 나라였다. 물론 미-스페인 전쟁이라는 예외가 있긴 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윌슨 대통령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들이 힘을 합쳐 전쟁국을 응징하는 국제연맹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 상원의 반대와 강대국 간에 이해가 맞지 않아 이 구상은 실패했다. 2차 대전 후에도 미국이 앞장서 국제협력을 통한 평화 유지를 위해 유엔을 만들었다.

국제정치를 보는 두 개의 눈이 있다. 하나는 국제사회가 독립적인 주권국가로 구성돼 있어 이를 통제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힘밖에 없다는 현실주의의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나라에 경찰이 있듯이 국제사회도 이러한 초주권기구를 만들어 질서를 관리하자는 이상주의 입장이다. 현실주의자는 평화는 오직 국가 간 힘의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하다고 보는 반면 이상주의자는 힘이 아닌 국제법과 국제여론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과거의 미국은 이 이상주의, 또는 국제주의의 대변자였다. 지금 미국에서도 20만명 이상의 반전데모가 일고 있는 것도 이상주의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의 국제현실은 두 조류의 혼합이었다. 국제주의를 대변하는 유엔 틀 속에서 미.소 양대 진영의 힘의 균형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는 양극(兩極)시대였다.

소련의 붕괴로 세계가 다극(多極)시대로 넘어가는 듯이 보였으나 현재까지는 미국만이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지금 국제사회는 강대국 간의 힘의 균형이 아니라 미국 혼자 힘의 우위라는 틀 안에서 질서를 잡아가고 있다. 미국 일방주의는 이런 힘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런 초강대국이 9.11테러를 당했다. 1위인 미국 국방비가 2위에서 10위 나라를 합친 것보다 많을 정도인데도 뉴욕 중심부를 테러로 강타당했다.

테러전에는 초강대국이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은 이래서 시작됐다. 그러나 프랑스나 독일은 입장이 달랐다. 이라크가 테러국이라는 것을 입증하라는 것이었다.

유엔 안보리 전쟁 결의가 안된 원인이었다. 미국은 과거의 이상주의.국제주의를 버리고 혼자라도 전쟁을 하겠다고 나섰다. 현실주의로 돌아선 것이다.

미국은 프랑스나 독일이 반대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국가이익에 따라 미국 일방의 국제질서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프랑스와 독일인의 반전데모는 그들 국가이익과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국제현실을 선악의 개념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가. 전쟁으로 어린아이가 희생당하는 부당함에 데모를 벌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서울에서 반전데모를 벌여도 미국 우위의 세계질서는 아마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국력 크기가 중간 정도인 우리의 선택은 두 가지다. 자존심이 상할지 모르나 미국의 질서 속에 포함되든지, 아니면 저항하는 길이다. 우리 정부가 전쟁을 지지한 것은 미국 질서에 포함되겠다는 의사표현이다.

*** 北核에 대해선 왜 말이 없나

여기에다 우리는 북한문제가 있다. 우리의 반전데모는 미국이 이라크 다음에 북한을 공격하려는 전쟁세력이라는 주장이다. 미국이 왜 북한을 공격하려 할까.

북한이 핵을 만들어 테러국을 지원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 핵은 우리도 위협하고 있다. 막내딸아, 그렇다면 누가 더 나쁜 나라냐, 미국이냐 북한이냐? 반전데모 때 왜 북한에 대해서는 말을 못하니? 우리의 국익을 위해서는 무엇을 택해야겠니? 네가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렴.

문창극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