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의 『광야』|유민영 <연극 평론가·한양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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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국립극단이 광복30주년 기념 연극제로 공연 중인 『광야』(김기팔 작·이해랑 연출. 6∼11일·국립극장서)는 1918년부터 45년까지의 한국 독립 투쟁사를 소재로 한 극이다. 강인하고 끈질겨야 할 독립 투쟁사가, 그러나 이번 『광야』공연에서는 추하고 나약한 패배사로 나타나 있다.
독립을 주제로 한 이 극을 보면서 관객은 일제 때 공연된 박승희의 처량한 『아리랑 고개』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독립 운동을 소재로 한 극에서 감동 대신 토지를 잃고 북간도로 유랑하는 민족의 슬픔을 그린 『아리랑 고개』를 회상케 되는 연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소박한 애국주의에만 입각, 역사를 보아서도 안되지만 결코 부분적인 치욕에 매달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드라마」를 이루는 핵심인 갈등과 상극조차 없고 초라한 늙음만이 만주의 광활한 설원 위에 펼쳐져 있으며 기껏 양반과 상인의 반목, 아편 재배를 해야 하느냐의 여부 등 극히 부분적인 실화에 매달려 있다.
해방 후 세대인 작가가 의연한 민족의 내적 정신 흐름을 포착치 못하고 기껏 식민지 사관에서 이 작품을 썼고, 연출가는 이런 작품을 「센티멘탈」한 주제 음이 반복되는 음악을 계속 이용해 가며 연출했다는 것은 아연하다.
늘 지적되는 국립 극단 배우들의 느린 연기 역시 여전해, 『광야』는 독립 투사에 대한 추모나 민족 정신의 고취 공연이 아니라, 모독의 「멜러드라머」가 되었다. 이런 작품을 광복 기념 공연작으로 선정한 국립극장 운영진의 양식이 의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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