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진우의 저구마을 편지] 흙바람 몰아치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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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국토 남단에 있는 이 마을에 돌연 흙바람이 휘몰아쳤습니다. 저 멀리 중동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삭막한 도시를 훑으며 날아온 바람일까요? 불길한 바람에 바다도 흥분한 개처럼 으르렁댑니다. 그래도 꽃은 피었습니다. 거제 장에 가는 버스 안에서 피처럼 붉은 동백과 눈꽃 같은 매화.벚꽃을 질리도록 보았습니다. 앵두나무를 사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바람이 잦아지는가 싶었습니다. 마당에 들어서자 흙바람이 와락 달려들어 뺨을 후려쳤지요.

며칠동안 전쟁 소식에 밤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그 전쟁이 꼭 제 탓만 같습니다. 이기심.욕심.게으름.무관심, 그간 저지른 온갖 악행들이 모래알처럼 눈에 박힙니다.

중학교 시절, 반장이랍시고 떠드는 아이를 흠씬 팬 적이 있습니다. 제 형이 저에게 말했지요. "네가 정말 그럴 자격이 있냐?" 담임 선생님은 다른 말을 했습니다. "잘 했다." 자격이 있다하여도 때리는 건 잘못입니다. 제일 못난 짓이지요. 이걸 깨닫기까지 2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흙바람 속에서도 앵두나무를 심었습니다. 누군가 잘 익은 앵두를 따 먹으며 잠시라도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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